나를 소개할 때 소모품 중 4B연필은 키워드 0순위다. 커터 날로 연필을 깎는 일은 일상 중 가장 흔한 일인데 가지런히 깎아 놓은 연필을 보고 가끔 누군가는 대단한 일인 양 감탄을 해준다.
연필을 깎을 때 삼나무인지 향나무인지 그런 것엔 관심을 주지 않았다. 사각사각 소리도 감흥이 없었다. 다만 깃털처럼 깎이는 나무는 기분을 상쾌하게 했고 제멋대로 결이 갈라져 나가는 나무는 애를 먹였다는 사실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즐거워한 것은 별것 아닌 것이 아니었다. 자주 연필을 깎아야겠다.
연필이 자주 부러지고, 뭉툭해진 연필 끝을 골고루 돌리며 뾰족하게도 하고, 눕혀서 면을 칠해보기도 하며 흰 도화지에서 맘껏 놀게 해야겠다.
4B연필이 짧아질수록 소묘는 철근 덩어리 같지만 무거운 것이 다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은 달콤해지며
아직은 발견되지 않은 별을 꿈꾼다.
연필을 깎으며 달을 마주한다.
2017.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