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오(竹塢) 이근오(李覲吾)는 1760년(영조 36) 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석천리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중오(中吾)였는데 어느 날 꿈에 임금이 이름을 바꾸라고 해서 근오로 개명했다고 한다. 자는 성응(聖應), 호는 죽오(竹塢)·석천(石川)·남간(南磵) 등을 썼으며 본관은 학성(鶴城)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한 자질을 보였던 이근오는 10대 중반에 경주 보문의 활산 남용만 문하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출사의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1790년(정조 14) 대과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의 동향을 전달하고 지역의 현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세가 약했던 영남 남인의 고충을 겪기도 했다.
결국 ‘지역’과 ‘문벌’이란 두 가지 점에서 한계를 느낀 이근오는 병조정랑을 끝으로 1804년(순조 4) 45세 때 낙향했고 이후 독서와 후진 양성에 매진하는 한편 울산, 언양, 경주, 양산, 밀양 등 동남 지역의 인사들과 교유하며 지역의 여론 주도층으로 활약했다.
조정에서 몇 차례 사헌부지평과 부사직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더 이상 출사하지 않았고 1834년(순조 34)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