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헤더배너
상품평점 help

분류

이름:생 타망 (Marc-Antoine, sieur de Saint-Amant)

출생:1594년

최근작
2014년 9월 <구원받은 모세>

생 타망(Marc-Antoine, sieur de Saint-Amant)

1594년 9월 30일 루앙에서 가까운 끄빌리(Quevilly)에서 태어났으며, 1661년 12월 29일 파리의 한 호텔에서 생을 마감했다. 17세기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이었으며, 고전주의 학파의 전통과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영감과 환상에 따라 자기 시대를 가능한 가장 충실하게 반영한 리베르탱 시인이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출신으로 22년 동안 영국 함대를 지휘했던 아버지를 따라 유럽의 여러 나라, 카나리아와 아프리카 해안, 카리브 해와 서인도 제도 등을 여행했고, 영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음악, 회화, 과학에 조예가 깊었다. 레 공작(duc de Retz), 크레키 원수(Marechal de Crequy), 아르쿠르 백작(comte d’Harcourt), 폴란드 왕비가 된 마리 루이즈 드 공자그(Marie-Louise de Gonzague) 등 많은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그들의 외교 활동과 원정길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의 시의 테마와 주제는 폐허에서 바다의 풍경까지,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상의 즐거움에서 종교적 명상과 당시의 정치 사회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바로크의 다양성을 다루었으며, 독창적인 상상력과 영감이 넘치는 작품들을 창작했다. 생 타망은 롱도와 트리올레, 엘레지, 서간시, 풍자시, 오드와 성경의 서사시 『구원받은 모세』(1653)를 비롯해서 에피그람에서 소네트에 이르기까지 가장 다양한 시 형식과 장르를 넘나들었다. 특히 그 당시 그의 작품의 성공과 인기는 상당한 편집 수에도 입증이 되고 있는데, 1629년 작품집의 제1권과 1631년의 1권 연속권 등이 각각 5판이 나왔으며, 1643년 제2권도 2판, 1658년 마지막 작품집이 3판이 각각 출판되었다. 이러한 작품집 이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따로 수많은 부수가 재판, 출판되었다. 『구원받은 모세』의 경우 17세기에 일곱 번의 재판과 약 6000~8000부가 출판되었고, 여러 복제품도 나왔다. 특히 『우스꽝스러운 로마』는 재판된 수로 봐서도 대단히 성공을 거둔 것으로 입증이 되고 있는데, 총 열네 번의 재인쇄와 재판이 있었다. 생 타망은 17세기 동시대 많은 작가들에 의해 거의 일생동안 “유명한 생 타망” (le fameux Saint-Amant)으로 대단히 평가받았지만, 그의 사후 고전주의 이론가인 부알로(Boileau)에 의해서 형편없고 우스꽝스러운 작가로 비판받아 이후 거의 200년 동안 프랑스 문학사에서 사라졌다가 테오필 고티에에 의해 복권되어, 오늘날 프랑스 바로크 문학을 가장 잘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표작
모두보기
저자의 말

<구원받은 모세> - 2014년 9월  더보기

시에 대해 내가 가진 재능을 전보다는 좀 더 진지하게 발휘해 보고, 나에게 재능을 주신 분의 영광을 위해 나는 몇 년 전부터 이 작품을 시도했다. 나는 여러 번 이 작품에 착수했다. 그러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하고 7,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마침내 내가 지독하게 마음먹고 작품을 시작했고 마지막 손질을 하면서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살펴보았다. 마치 긴 여행을 하고 와서, 자신의 시골 별장에 돌아와 있는 느낌이었고, 정원을 둘러보면서 이리저리 자리를 배치하면서 바꾸는 그런 심정이었다. 이쪽에 나무 한 그루를 뽑아다가 저쪽에 심고, 화단의 모양을 바꾸고, 가운데에 분수를 배치해서 전체를 아름답게 해 보기도 했다. 또 그 주위를 조각상으로 장식하고, 과수나무들을 손질하며 새롭게 바꾸는 식이었다. 그 결과 비록 정원의 배경이나 울타리도 똑같은 것이었지만, 전에 그걸 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사람들마다 취향은 다 다르다. 즉 전에는 훌륭하게 보였던 것이 이제는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젊을 때 어떤 것에 대해 그렇게 감탄했던 것이 이제는 별로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나이가 들면서 판단이 바뀌는 것이다. 특히 그것이 정신의 산물인 경우 더욱 그렇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좀 잘 못하는 일이 있거나, 좀 개구쟁이 짓을 해도 사랑스럽다. 그러나 언젠가,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여겼던 새로운 것도 자신도 모르게 싫어질 때, 그 결점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좋아했던 것에 합리적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오로지 그것을 고칠 생각만 한다. 그 점에 대해서 내가 할 말이 수없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설득력 있게 언급한 바 있어서, 그 점은 생략하고 내 주제로 넘어가겠다. 내가 이 작품에 서사시라는 제목을 붙이고, 거기에 프랑스어에서도 생소한 전원시라는 말을 덧붙이거나, 보통 그리스나 이탈리아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설화나 공상 이야기들을 사용했다고 다짜고짜 놀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허나 내가 시도하는 작품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거나, 내가 그 유명한 프랑스 아카데미를 참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점에 대해 양해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서사시처럼 어떤 이야기를 줄여서 하기보다는 전원시처럼 더 길게 늘이는 것이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서사시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고 있다. 내 작품에는 행동하는 영웅적인 인물도 없고 큰 전투도 없으며 정복해야 할 도시의 본부도 없다. 또 서사시가 1년 혹은 약 1년 정도 걸리는 사건이지만, 여기서는 단 하루 만에 일어나는 이야기다. 거기에는 트럼펫보다는 류트가 더 어울린다. 즉 서정적인 요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내가 재현하는 모든 등장인물은 영웅적일 뿐 아니라 성스럽고 신성한 존재다. 또 나처럼 필력이 하찮아도 가능한 일인 만큼 내가 아무리 능력 없고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해도 감히 신을 영광스럽고 인자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그만큼 거기에 신성한 존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주제 넘는 일이라기보다 훨씬 더 정의로울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러 일화를 섞어서 소위 말하는 ‘장면’을 채웠다. 내가 고대 (서사시)의 규칙을 존중하고 잘 알고 있지만, 거기에 완벽하게 따르지는 않았다. 창조적 새로움을 위해 나에게 아주 새로운 규칙을 만들면서, 오로지 이성만이 그 규칙을 받쳐주는 강력한 권위일 거라고 판단했다. 사실 어떤 일이 올바르고, 인물, 장소, 시간에 잘 어울린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정을 했든 안 했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가 지난 수세기에 걸쳐 그런 운명의 규칙을 발견해 낸 것이고, 그런 규칙 중에는 자신이 하지도 않은 다른 규칙도 만들어냈을 것이다. 우리 당대인들의 철학은 그가 주장한 철학이나 그가 내세운 모든 원칙과 정의에 항상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성경 이야기를 창작해 놓았다든지, 성경에 전혀 언급되지 않는 인물을 등장시켰다든지, 나에게 그런 이의를 제기하기 전에, 비록 성경에 나오는 모든 사건이 진실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게 다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자 한다. 물론 성사(聖事)나 말씀에 속하는 것도 있고 그걸 다루는 게 미묘한 일이기는 하지만, 순전히 역사적인 것들도 있으며, 똑같은 사건에 대해 중요한 핵심만 절대 바꾸지 않는다면, 더 대담하게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욥기의 이야기 경우, 신자들을 교화하려고 모세가 스스로 종교적으로 창작한 잠언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제도 있다. 깊은 명상이나 장황한 설명으로 어떤 사건을 그런 식으로 창작할 수 있으며, 내가 처음으로 그와 같이 그런 방식을 사용한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역사가처럼 쓰는 방식도 있고 시인처럼 쓰는 방식도 있다. 거짓을 진실로 여기기를 원하지 않을 때 그 거짓은 거짓이 아니다. 시에 허구를 없애버리면 모든 것을 다 없애버리는 것과 같다. 진정 진실한 작가는 어떤 진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정말 있음직한 일을 강조하는 것이 시의 관례라고 적절하게 지적했다. 그 점에서 사나자르는 나만큼 조심하거나 신중하게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성모의 시?에서 온갖 주제로 여러 우화를 다 섞어도 지금까지 교회 측으로부터 비난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신화의 이름을 사용했는데, 하늘 대신에 올림푸스, 지옥 대신에 하데스나 아베르노, 불 대신에 불카누스, 바람 대신에 아이올로스나 보레아스, 대지 대신에 케레스 혹은 키벨레, 바다 대신에 넵투누스나 테티스, 여왕이나 공주 대신에 님프, 천사 대신에 요정 등 여러 다른 이름도 그런 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건 좀 더 시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나는 한 번도 우화를 경솔하게 인용한 적이 없다. 신의 섭리 대신에 운, 운명, 행운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데 불편한 점이 없었다. 과학이나 직업, 예술에 각각 특별히 사용하는 어색한 말이 있듯이 시도 공정 여부를 따지지 않고 적절하다고 생각할 때는 거기에 사용할 수 있는 그 자체의 용어가 있다. 나는 그 중에서 오직 서사시에서만 허용하는 새로운 혹은 낡은 용어를 삽입할 것이다. 그런 말을 봐도 잘못 사용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 ‘여러’ ‘다수’를 의미하는 maint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단수로도 복수로도 쓰는 아주 편리한 말이고,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게 판명됐지만, 본 작품에서 maint은 운문보다는 산문 느낌을 주는 ‘여러’(plusieurs)나 ‘다수’(beaucoup)보다 훨씬 더 나은 낱말이다. 멋지고 오래된 앤틱 의자가 때로는 더 우아해 보이고, 가장 멋지고 가장 화려한 가구로 장식된 방에서 단연 돋보이는 법이다. 이런 종류의 시를 썼거나 쓰고 있는 나의 유명한 동료 작가 중에는 우리 프랑스어에서 훌륭하고 아름다운 표현을 다양화해서 자신의 뜻대로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낱말이 수없이 많다고 고백하는 작가도 있다. 나로서 그리스어나 라틴어에 대해 뭐라 하더라도, 또 그것이 프랑스어보다 아무리 풍부하고, 많은 장점이 있다하더라도,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가 그들의 다양하고 풍부한 사상과 비교해서 프랑스어가 빈약하고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정신 속에 그 붓 끝까지 통하는 어떤 이미지가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이것은 내 생각이며 다른 사람은 다른 생각이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내가 인용하는 몇 가지 우화에 대해 한 마디 더 하자면, 어떤 소재가 이교도식으로 짜여 있다고 해서 기독교 제단을 장식하는 데 이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고대가 남겨준 특별하고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으며, 그것을 신성하고 합리적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판테온이나 거짓 신을 모신 수많은 신전, 영원하고 진실한 신을 모신 교회도 그렇게 된 것이다. 심하게 비난하거나 부당하게 내 작품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를 대비해서 나 자신을 방어하는 것의 일부다. 다른 특징으로 넘어가자. 나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요세푸스와 필론의 저서에서 많은 내용을 참고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에티오피아로 여행했다는 것과 모세를 나일 강에서 구한 파라오의 테르무티스 공주가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두 인물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던 내용을 자유롭게 덧붙일 수 있었다. 내가 이미 말한 바처럼 내가 서사시의 법과 규칙을 정확하게 따르지 않지만, 나로서 그 규칙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서사시가 요구하는 중요한 원칙인 장소와 사건의 일치를 지키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희곡에서는 (시간의 일치를) 의무적으로 지키고 있듯이 내 주제를 단지 24시간 안에 한정하지 않고 거의 하루의 절반 정도로 할애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나 호라티우스, 스칼리제, 카스텔베트로, 피콜로미니 등 고대 작가를 뛰어 넘는 것이고, 다른 근대 작가들도 그런 규칙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다행히도 나는 서사시에서 다루는 규칙을 모두 해결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또 그것을 좀 여유를 가지고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이성과 공정이라는 시선으로 본다면 거기에 포함된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뒤죽박죽된 것들은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고대 작가들을 우상으로 여기고 그들을 모방하는 것만을 좋아하고, 오로지 그들이 말한 것만 맹목적으로 집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치 인간 정신이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창작할 자유가 없는 것처럼, 내가 여기서 나 자신의 독창적인 능력을 제시하는 것보다도 남들보다 얼마나 잘 표절했는가를 더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어느 날 자신의 몇몇 친구를 대접하면서 맛없는 술을 억지로 마시라고 강요하고, 한 잔 마실 때마다 ‘친구들아, 이 술이 비록 하찮아 보여도 우리 집의 특산주야’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 친구 중 한 명은 술을 마시면서 인상을 찡그리고, 갑자기 화를 참지 못하겠지. 맛이 단연 다르군, 맛이 더 나아라고 말한다고? 천만에. 나는 사실, 코르네유가 호라티우스의 글로 포장하는 것처럼 남의 글로 나 자신을 포장하는 거를 너무 싫어한다. 나는 대부분 내가 스스로 만든 화단에서 딴 꾸밈없는 꽃으로 꽃다발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즉 아무리 사소한 묘사라도 그것은 나의 특별한 특징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대부분 아주 작은 재주를 발휘한다. 그러나 전에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거나, 또 코끼리보다는 파리의 구조에서 더 창의력이 풍부하고 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 사람으로 판단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가장 어렵고 가장 고상한 소재들을 기꺼이, 그리고 열정적으로 시도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또 나의 영감에 절제와 겸손의 교훈을 과신한 것도 아니며, 영웅시를 확대함으로써 용기와 능력을 보여주거나, 내가 거기에 가장 사소하지만 가능한 가장 큰 명예도 얻었던 하나의 서사시 영역을 제시했기 때문도 아니다. 뮤즈가 스스로 방어하기 힘든 어떤 남모르는 공허함 속에서 어느 정도 여론을 합리화할 수 있거나, 가장 진중하고 가장 숭고한 주제에 빠질 때 그 요소에서 최선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어떤 견본을 세웠다는 생각을 해서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전적으로 부인하고 세상의 어떤 말에도 귀 기울이고 싶지 않은 것은 자부심으로 우쭐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내 작품에 대해 몇 가지 변명하고 마무리하고자 한다. 특히 예술이 (모방이 아니고) 창작이 되지 않던 시대에 내가 그림이나 태피스트리에 유능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는 점에 대한 것인데, 이집트 사람들 사이에 그런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그들의 상형문자가 거의 동물과 여러 사물을 형상해 놓거나 재현한 것들이라서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은 그림을 그릴 줄 아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 외에도 폴리도로 베르질리오의 저작에는 그들이 그리스 사람들보다 수세기 전에 그림 그린 것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여자 인물들이 수영을 하게 한 것에 대해서는 그 당시 모든 오리엔트 국가들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와 남유럽(의 자료)에서도 나타나는 공통적인 요소다. 내 이야기가 자연의 법칙에 따른 점도 고려해야 한다. 종교의 진리가 거기에 들어 있는데, 히브리 사람들이 진정으로 유일신을 인정하고 숭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할례를 모든 의례와 의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이교도와의 중요한 차이였다. 이 때문에 나는 80년 이후에도 존재했던 엄격한 법이나 현재에 존재하는 은총의 법에 따랐다면 내 등장인물들에게 말하게 하지 않았을 것들을 그들에게 말하게 할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성경에 열중한다면 나는 이 작품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야곱이 때로 한 인간으로, 또 때로는 히브리 민족 전체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줄 것이다. 파라오라는 이름이 로마 사람들에게 케사르처럼 존엄을 가리키기보다는 이집트 사람들에게 왕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라는 점은 굳이 말할 필요 없다. 오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내 작품에는 세 명의 파라오가 나오는데, 첫째는 요셉 시대를 통치했던 파라오, 그 다음은 모세가 태어나던 시대의 파라오, 마지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던 시대의 파라오이다. 첫 번째는 아주 훌륭하고 지혜로운 왕으로 그때 요셉은 그의 꿈을 해석해 주고 대단히 높은 자리에 올랐다. 두 번째는 아주 잔인하고 사악한 왕으로 히브리 사람들에 고통을 주고 그 자식들을 학살하게 했다. 세 번째는 이집트에 닥친 놀랍고도 끔찍한 환난에도 오만과 아집을 절대 꺾지 않고 자신을 집어 삼킨 바다 속에까지 격렬한 분노를 간직한 고집스런 괴물이었다. 엘리자프와 메라리가 악어와 벌이는 싸움에서 나는 길들인 몽구스 두 마리가 그들을 따라 다니도록 했다. 몽구스를 보통 파라오의 쥐라고 부르고 있어서 몽구스가 많이 있을 거라는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박물학자들이 인정하듯이, 몽구스는 사나운 작은 동물에 불과하지만, 적의를 품고 굴뚝새와 함께 모의를 하면 뱀에게 가장 위협적이며, 가장 크고, 가장 끔찍한 악어를 쓰러뜨린다. 내가 파리에서 보았던 몽구스의 모습과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볼 수 있었던 그 모습을 언급할 것이다. 그놈은 거의 오소리처럼 생겼지만, 다리가 훨씬 더 길고, 몸통은 더 호리호리하며 날카롭다. 머리는 흰족제비와 아주 가깝고, 눈은 예민하며, 털은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길고 곤두서 있고, 회색과 검은 색을 섞어 놓았다. 내가 인용하는 몽구스는 정말 대담하고 으스대고 용감해서 두세 마리의 늑대 사냥개를 막아낼 뿐만 아니라 절대 놓치지 않을 정도로 아주 맹렬하고 격렬하게 가장 먼저 덤벼드는 모습을 보았다. 악어는 비록 잘 알려져 있고, 호기심 전시실에 (박제되어)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겠지만, 길이가 25 내지 30자에 달하는 것도 있다. 정말 오래 사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악어에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내 작품의 마지막에 나는 밤을 묘사하는데, 밤중에도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들, 온 이탈리아와 근동 국가들이 반딧불이로 가득한 광경을 언급한다. 이 세상에 그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반딧불이는 움직일 때마다 두 날개 아래로 이(爾)처럼 생긴 커다란 두 개의 불빛을 던지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온통 뒤덮인 말 털이나 바로 우리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그 불빛을 보았다. 반딧불이는 벌떼처럼 무리지어 날아다니고, 공중에 반딧불이로 가득차서 반짝거리면 다른 빛 없이도 쉽게 길을 갈 수 있으며, 그들의 숫자나 움직임으로 눈이 부실 정도다. 그러나 나는 서문 대신에 조금씩 해설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내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것인지 아닌지는 걱정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나만큼 그렇게 많은 여행을 해보지 않았거나, 내가 여행하면서 거의 모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자연의 모든 희귀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그런 속성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타소는 그의 <서사시론>에서 알레고리를 생각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반 이상 그렸지만, 나머지는 알레고리로 채웠다고 한다. 그 점에 대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내가 지어 낸 이야기의 대부분은 알레고리로 채웠음을 인정한다. 이를테면 모세의 요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 모세를 괴롭히는 폭풍우나 악어, 파리 떼, 독수리 공격 등이 그렇다. 그 외에도 그것은 그런 상태에서, 그런 장소에서 정말 있을 것 같고 자연스러우며 그럴 것 같은 추측들에는 수수께끼 같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 내면에는 어떤 사람들에게 떠오르는 것을 제시하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그런 것을 찾다보면 내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을 말해 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 문체와 내 시를 쓰면서 내가 관찰한 방식에 대해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2부나 4부에서 의미가 완전히 완성되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다. 때로 박자를 다양하게 하려면 그 박자를 끊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연속적인 획일성에서만 나오는 것으로, 귀에 권태를 일으킨다. 그런 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음악적 관점에서 리듬을 끊는다고 하는데, 이전의 방식에서 나와서 더 유쾌하게 새로운 방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서술하는 문체와 묘사하는 문체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일 것이다. 전자는 가끔 다루는 방식의 특징에 따라 틀림없이 단순하거나 비유적이다. 후자는 독특하며 올바르고 의미 있는 낱말들이 뒷받침되어 있다. 결국 모든 문체는 저속한 표현을 제외하고 위대한 시에서 그 합리적인 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음악이나 회화에 대한 특별한 조예가 없이, 조화와 표현 때문에, 훌륭한 시를 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며, 그만큼 시와 친사촌과 같은 이 두 장르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계속해서, 모든 요구된 상황에서 이런 점을 말했다면, 나는 언급할 수 있는 100분의 1도 다 얘기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을 인쇄하는 동안 나는 위중한 병에 걸려서, 서문을 쓰면서 수정하지 못해 서둘러서 가제본했는데, 그 흔적이 남을 것이다. 나는 정확하게 모든 증거를 다시 검토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거기에 많은 오류가 그대로 남았고, 구두점, 생략, 몇몇 글자의 변화도 있었다. 무엇보다 소문자 자리에 대문자, 대문자 자리에 소문자로 표현된 게 있다. 내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더는 정리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작품이 재판될만하다면 재판 때 수정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독자들이 이런 오류에 대해 용서해 주기를 바라고, 회초리를 들고 결코 지나치지 못했던 글을 너그럽게 봐주기를 바란다. 내가 이 작품을 12부로 나누었다고 말한다는 것을 잊었다. 그것이 비록 서로 연관이 되어 있지만, 한 내용으로 읽을 수 있고 원하는 곳에서 그만두어도 좋다. 나는 휴지(休止)가 있어야 할 곳에 휴지가 있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저자 서문
가나다별 l l l l l l l l l l l l l l 기타
국내문학상수상자
국내어린이문학상수상자
해외문학상수상자
해외어린이문학상수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