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중요한 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토마스 F. 토렌스는 1913년 8월 30일, 중국 서부 쓰촨성 청두에서 중국내지선교회 파송 선교사인 토마스 토렌스와 애니 엘리자베스 토렌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두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부모님의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에든버러, 바젤,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1934년 에든버러 대학의 뉴칼리지 조직신학 교수인 휴 로스 매킨토시에게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 방법론’을 배우면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소개받았고, 이는 바르트 신학에 관심을 두는 계기가 되었다. 1937년부터 바젤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바르트의 지도하에 “속사도 교부들의 은혜 교리” 논문을 작성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존 베일리의 뒤를 이어 뉴욕 북부 오번 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 및 신학과 자연과학의 상호관계성에 대해 강의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프린스턴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했다(1939년). 하지만 유럽 사회에 임박한 전쟁으로 에든버러로 돌아오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1940년 목사 안수를 받은 뒤 1943년까지 스코틀랜드 알리스의 교구 목사로 사역했으며, 이후 군목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복무하면서 삶과 죽음의 가장 첨예한 순간을 경험했다. 이러한 경험은 ‘종이 신학’(paper theology), 즉 흥미롭게 읽을 수는 있지만 살고 죽는 인간의 실존을 논하기에는 부적합한 지극히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 신학을 거절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6년 마가렛 스피어와 결혼했고, 이듬해 스코틀랜드 애버딘의 비치그로브 교회에 부임하여 3년간 목회 사역을 했으며, 이 시기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 사이의 자연신학논쟁을 풀기 위한 시도로 Calvin’s Doctrine of Man(1949)을 출간했다. 또한 저명한 신학 학술지 Scottish Journal of Theology를 잭 레이드와 함께 창간하여 27년 동안 공동 편집자로 함께했다. 1950년 에든버러 대학 뉴칼리지 교수가 되어 1979년까지 재직하면서 학문적 활동에도 집중했다. 1952년 번역팀을 조직하여 바르트의 Kirchliche Dogmatik를 영어로 옮기기 시작했는데, 이 프로젝트는 25년이나 이어졌다.
그가 1941년부터 1999년까지 직접 썼거나 번역 혹은 편집한 책과 논문은 633편이나 된다고 전해진다. 주요 저서로는 Theological Science(1969), Space, Time and Incarnation(1969), God and Rationality(1971), The Trinitarian Faith(1988), The Christian Doctrine of God: One Being Three Persons(1996), Divine and Contingent Order(1998) 등이 있다. Theological Science가 영국의 신학, 윤리, 사회학 분야의 최고 작품으로 선정되어 ‘콜린스상’을 수상했으며,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도 수상했다.
세계교회협의회 신앙 및 직제 위원회 위원이자 스코틀랜드 교회 세례 위원회 의장,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교부와 종교개혁신학에 남다른 이해와 깊이를 가지고 개혁교회와 정교회 간의 신학적 대화를 주도했다. 목사, 신학자, 교수, 교회 활동가로서 지대한 공헌을 남겼으며, 생애 마지막 몇 년을 요양원에서 보내면서도 신학적 관심과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2007년 12월 2일 작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