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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즈미시키부

국적:아시아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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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마쓰이본 이즈미시키부집>

이즈미시키부

이즈미시키부(和泉式部, 978?∼1036?)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엽에 걸쳐 활약한 여류 가인이다. 일본 문학사에서는 헤이안(平安, 794∼1192) 시대, 또는 중고 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해당한다. 그녀의 부친은 에치젠(越前, 지금의 후쿠이 현 북동부 지역) 지방의 수령인 오에노 마사무네(大江雅致)라는 인물이다. 이십 세 무렵 이즈미 지방 수령인 미치사다와 결혼한 이즈미시키부는 ‘시키부’라는 이름에 남편 부임지인 ‘이즈미’가 붙어 이즈미시키부라 불리게 된다. 남편 미치사다와의 사이에 태어난 딸이 고시키부(小式部)다. 그녀는 남편 부임지에 머문 적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도읍지인 교토에서 지냈다. 그러는 동안 레이제이(冷泉) 천황의 셋째 아들인 다메타카(爲尊) 친왕의 사랑을 받게 된다.이로 인해 그녀는 부친으로부터 의절을 당하고 미치사다와의 부부 관계도 깨지고 만다.

그러나 1002년 6월 다메타카 친왕은 스물여섯의 나이로 사망한다. 다메타카 친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숙의 시간을 보낸 지 1년이 되는 시점에 극적으로 시작된 것이 바로 아쓰미치 친왕과의 사랑이다. 레이제이 천황의 넷째 아들인 아쓰미치 친왕은 대재부(大宰府)의 장관인 대재수(大宰帥, 다자이노소치) 직책을 맡았던 관계로 소치노미야(帥宮)라 불렸다.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굳은 결속으로 하나가 된 소치노미야와 보낸 기간은 이즈미시키부 생애에서 가장 빛나던 화양연화와 같은 시기였다. 스물여덟 살에는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이와쿠라노미야(石?宮)도 출산한다. 그러나 소치노미야도 1007년 10월 스물일곱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들의 사랑도 4년 만에 막을 내리고 만다. 사별 후 그를 향한 그리움은 면면하게 이어졌으며 결국 애절한 통곡은 가집에 120여 수에 달하는 만가(挽歌)로 남는다.

소치노미야 사망 일주기 후, 이즈미시키부는 딸 고시키부와 궁중으로 출사해 쇼시(彰子) 중궁을 모시게 된다. 궁중에는 이미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와 이세노다이후(伊勢大輔) 등 걸출한 재원이 출사해 있었다. 무라사키시키부도 ≪무라사키시키부 일기(紫式部日記)≫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즈미시키부는 그녀들 사이에서 돋보이는 존재였던 듯하다. 출사한 지 1, 2년 뒤에 이즈미시키부는 당대 최고 권력가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권유로 후지와라노 야스마사(藤原保昌)와 서른두 살 무렵 결혼한다. 이후 야스마사의 부임지인 단고(丹後, 지금의 교토 북부 지역) 지방으로 내려가 잠시 머물기도 하지만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이로 노령에 가까운 야스마사와의 결혼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로부터 50대에 들어선 이즈미시키부의 행적은 묘연하다.

이즈미시키부는 20대 중반에 충격적인 다메타카 친왕과의 사별을 거쳐, 30대에 생애 가장 사랑했던 소치노미야와의 사별에 이어 40대 후반에 다시 보석 같은 딸 고시키부를 여읜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죽음보다 더한 슬픔은 노래로 승화되어 남아 있는데 모성애가 발현된 뛰어난 노래로 인정받고 있다. 이로써 그녀는 일생 동안 세 번에 걸친 크나큰 사별의 고통으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절감했으며, 동시에 두 번에 걸친 크나큰 사랑을 가슴에 담은 채 생을 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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