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연말 문화는 평시의 그것과는 유독 이질적인 특성을 띠고 있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왕의 개인적인 취향이 반영된 것이라든가, 비이성적이기는 하지만 누습(陋習), 즉 오래된 전통으로서 지속된 것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왕조의 정치, 사상, 경제, 과학 등과는 달리 이 분야의 문화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의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이 ‘난장(亂場)’의 날에는 사관조차도 입시(入侍)는 하였으나 기록은 하지 않았던 전통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사관의 기록은 없지만 이날을 전후해 나례시 광대와 여기의 참여 및 내기놀이를 반대하던 사관과 대신들이 조목조목 비판한 덕분에 당일날의 전모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제도화 되어 가는 과정에서 왕실의 연말 문화 또한 제도화에 속도를 맞춰가야한다는 논의는 꾸준히 제기되었다. 그러나 왕실의 연말 문화는 조선 중기 이후로는 유교주의 국가 이념이 극에 달하면서 점차 쇠퇴하여 더 이상 궁 안에서는 치러지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의 연말 문화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실에서는 소략해지고, 영접의식으로서 도상(途上), 즉 야외에서는 더욱 성대해졌다. 비록 조선 후기에 이처럼 더 이상 왕실의 유연했던 연말문화는 쇠퇴하게 되었지만, 이때에 갈고 닦여진 각종 문화들은 도상에서 더욱 꽃을 피웠고, 더 나아가서는 세련된 형태로 국가 영접 의례나 서민 문화에 파고들게 되었다. 이처럼 왕실의 연말문화는 융합과 발전을 거듭해 조선의 독창적인 문화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