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시인이자 번역가, 문예평론가다. 무로 사이세이와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영향을 받았으며 프랑스 근대 시와 동양 전통 시의 수법을 각각 받아들여 현대 시의 서정성을 지적이고 순수하게 표현하여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했다.
1900년 오사카시에서 인쇄업을 하는 가정의 열 명 중에 장남으로 태어난 미요시는 유·소년기부터 다카야마 조규, 나쓰메 소세키, 도쿠토미 로카 등의 작품을 탐독했다. 1914년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가업인 인쇄업이 점차 몰락하여 중퇴하고 1915년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학비가 국비인 오사카 육군지방유년학교에 진학했다. 1920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고 북한의 회령에 1년간 국경경비대로 근무하나 이듬해 홋카이도에 이르는 대탈주를 하여 퇴교 처분을 받았다. 이후 동경제국대학 불문과에 진학하여 문학으로 인생의 길을 전환했다. 시 창작을 시작한 이후 가지이 모토지로 등과 교류했고 후에 《아오조라》에 16호부터 참가하여 모모타 소지 등에게 격찬을 받았다.
1927년 7월 가지이 모토지로가 전지요양하던 이즈 유가시마에서 그를 병문안하던 중 문단의 주요 인물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히로쓰 류로, 하기와라 사쿠타로를 만나 교류했다. 이즈 유가시마에서 올라와 10월, 시 잡지 《시와 시론》 창간에 관여했다. 이 무렵 사쿠타로의 여동생 아이를 만나 첫눈에 반하여 구혼했으나, 아이의 어머니의 반대에 부딪힌다. 1928년 결혼을 위해 간신히 얻은 일자리를 잃고 아이와의 약혼이 깨어진다. 절망한 미요시는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을 완역하고 파브르의 《곤충기》 번역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약 10년간 번역한 분량이 원고지 2만 매에 이른다.
1930년 첫 시집 《측량선》을 간행했다. 1932년 각혈을 했고 맹우 가지이 모토지로가 사망했다. 5월에 병원 입원을 기하여 프랑시스 잠이나 한시의 기법을 시에 도입했다. 6월에 퇴원을 했고 8월에 두 번째 시집 《남창집》를 간행했다. 1934년 1월 기시다 구니오의 중매로 사토 하루오의 질녀 사토 지에코와 결혼하여 그해 12월에 장남이 태어났고 1937년 장녀가 탄생했다. 1940년 가을에 2개월간 서울, 경주, 부여 등지를 방문하고 시와 기행 수필을 남겼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의 승리나 일본 국가와 국민을 찬양하는 전쟁 시를 많이 제작하여 《승전보에 이르다》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일본문학보국회로부터 위촉을 받아 〈결전의 날이 왔구나〉 작사도 했다. 1942년 아이가 사별하자, 1943년 미요시도 지에코와 이혼하고 아이와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1945년 2월 아이가 도쿄로 도망쳐 돌아가 다시 이혼했다. 1949년 후쿠이 미쿠니초에서 도쿄 세타가야구로 거처를 옮겼다. 1953년 예술원상(《낙타의 혹에 걸터앉아》), 1963년 요미우리문학상(《정본 미요시 다쓰지 시 전집》)을 수상했다.
1964년 심근경색에 울혈성 폐렴 합병증으로 병사했다. 1979년 사후 13주기를 기념하여 유족들에 의해 미요시 다쓰지 기념관이 건립됐다. 2019년 그가 사망하기 며칠 전에 쓴 마지막 원고 〈봄의 낙엽〉 자필 원고가 발견돼, 이듬해 2020년에 탄생 120주년에 맞추어 후쿠이현 후루사토문학관에 전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