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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번역

이름:김창규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직업: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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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원하시는 아기를 장바구니에 넣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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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규

2005년 과학기술창작문예 중편 부문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SF어워드 단편 부문 최우수상을 3회, 우수상을 1회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우리의 이름은 별보다 많다』 『삼사라』 『우리가 추방된 세계』가 있고, 『뉴로맨서』 『이중도시』 『유리감옥』 『블라인드사이트』 등을 번역했다. 대학에서 장르 스토리텔링과 세계관 구축을 강의하고 있으며, SF 드라마 제작에 작가로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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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말

<삼사라> - 2018년 10월  더보기

<우주의 모든 유원지> 나의 경우 글 하나를 쓰는 과정이 딱히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 인상 깊은 현실의 어느 장면이 줄거리와 단어를 줄줄이 끌고 다가오는 때도 있고, 정서와 틀만 정해두고 나서 빈 곳을 차근차근 채우는 때도 있다. 그 모든 요소는 일단 내가 ‘사물함’이라고 부르는 머릿속 공간에 들어간다. 사물함의 문은 대개 열려 있다. 나는 시각이미지, 메시지, 인상적인 장면이나 음색이나 문장 등을 사물함에 마구잡이로 던져 넣는다. 평소 차근차근 쌓아둔 메모까지. 그러고는 내킬 때마다 사물함 문을 여닫으며 내용물을 꺼냈다가 넣기를 반복한다. <우주의 모든 유원지>는 어느 게임에서 본 그림 한 장에서 시작되었다.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플라스틱 해바라기가 햇빛을 등지고, 사악하게 웃고 있는 그림이었다. 그다음에는 머릿속 사물함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광경 하나가 반짝거렸다. 3년 전에 놀러 갔던 부산 태종대 앞 인형사격장의 풍경이었다. 그 둘이 한데 어울리자 사물함 맨 꼭대기에서 늘 맴돌고 있는, ‘역사의 중요성’이라는 주제가 자신을 데려가라고 손을 흔들었다. 그것들을 한데 모아 한 칸에 넣고 문을 닫은 다음 빚은 게 <우주의 모든 유원지>다. 이 단편은 SF의 세부 장르 중 ‘스페이스 오페라’에 속한다. 등장인물들이 항성계나 은하처럼 천문학적인 무대를 오가는 활극을 일컫는다. 보통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전형적인 인물상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나는 수많은 전형 중에서 특히 양극단을 한 몸에 지닌 인물들이 좋다. 모순 속에 개성을 넣는 작업이 좋아서다. 노마는 외딴곳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이지만 그와 동시에 손님이 오지 않길 바란다. 거대한 진실이 그림자에 파묻히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지만 그러면서 자신의 신분은 숨겨야 한다. 동료들이 무사하기를 바라지만 임무를 위해서라면 동료의 신분까지 모르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기다림이다. 노마는 기다림의 화신이다. 어쩌면 그렇게 설정하면서 긴 세월 뒤에 끝내 빛을 발하고 마는 사실과 역사의 속성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잠깐 고개를 돌려보면 우리 삶도 대개 그렇지 않을까? 착실히 맡은 바를 다하고 기다리는 게 대부분, 어쩌다 흥이 붙거나 열기가 차오르면 크게 웃고 눈물을 짓는 순간이 잠깐. 그리고 다시…. 비록 소설 속 주인공은 기다림으로 점철된 일상을 접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도망길에 다시 올랐지만, 우리는 그런 고통을 허구 속 인물에게 맡기고, 선명하고 뒤흔들 수 없는 사실 속에서 일상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마저 허구에 빼앗기고 나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삼사라> 전자공학과를 졸업했지만,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두어 해를 빼면 전문직 개발자나 기술자로 살았던 기간은 없다. 과학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지만, 과학자는 아니다. 하지만 과학과 기술은 내게 아주 가까운 궤도에서, 나를 중심으로 늘 돌고 있다.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망원경에 비유할 수 있다면 내 망원경의 이름은 과학이다. 기술은 굳이 비유를 불러올 것도 없이 이제 우리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다가올 시대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술을 누리고 미래로 가는 과정이 매끄럽고 평탄하기만 할까? 많은 이들이 도중에 벌어지는 갈등과 충돌을 걱정하고, 그때 벌어진 틈이 굳어버릴지 몰라 두려워한다. 어쩌면 죄를 물을 대상을 찾다가 과학과 기술이 원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죄가 없지만, 세상을 과학적으로 해부하고 기술을 우위에 놓은 탓에 싸움이 벌어진 거라고. 그럼 무지에서 빚어진 외면과 배척은 누구 탓일까? 매년 열리는 한국과학문학공모전 입상자에게는 부상으로 나로우주센터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다. 심사위원을 맡았던 어느 해에 감사하게도 수상자들과 함께 우주센터를 견학했고, 돌아오는 길에 소록도에 들렀다. 오래전부터 여행코스로 굳은 길을 따라 소록도 바닷가를 걷고, 한센병 환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사진과 전시물과 실제 건물을 보면서 <삼사라>의 초안이 떠올랐다. 글 속 ‘주마병’이 한센병과 판박이인 건 그 때문이다. 글감이 생겼건만 여느 때와 달리 기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아픔을 품고 있는 이들을 너무 자주 외면한다. 쉽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망각이다. 그런다고 대상의 고통과 절망까지 사라질까? 그렇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동시대에는 이룰 수 없더라도 훗날 새 지식의 도움을 받아 재조명하고 세울 수 있는 것은 세워야 한다. 깨달음은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솟지 않는다. 각자 삶이 그렇듯, 인류라는 범주로 묶을 수 있는 지성체라면 긴 세월을 거친 시행착오가 가장 좋은 교재가 될 터이다. 누군가는 선천적인 한계 때문에 어리석음이 영원히 우리 뒤를 따라다닐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처럼 한계를 냉큼 설정하던 이들은 세상의 원리를 발견했다면서 변명과 차별의 도구로 악용하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도 물려받았다. 외면하는 대신 긍정적으로 공감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이성으로 한 번 더 깨달아야 하는 점일 것이다. 설사 그게 인류 전체의 다음 세대나 가능한 일이더라도, 그다음 세대가 조상과 완전히 다른 몸과 정신을 갖고 있더라도. <별상> 생전 처음은 아니지만 아주 오래전에 쓴 글이고, 작가라는 낯선 호칭을 이름 뒤에 붙일 수 있게 해 준 글이고, 그렇다 보니 치밀하지 못함이 유난히 눈에 밟히는 글이기도 하다. 다 영글지 못한 인생관이 조금씩 삐져나와 있길래 얼굴을 붉혀가며 다듬기도 했다. 이번에 다른 글과 묶인 참에 다시 이 글을 접하면서 심경이 복잡하지 않다면 허풍일 것이다. 이 글이 세상 빛을 본 시절 얘기를 하면 ‘왕년’이란 말을 쓰는 노인과 뭐가 다르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딘가에 적긴 해야 할 한국 SF계의 얘기라 이 자리를 빌고 싶다. 이 단편은 2005년 ‘한국과학기술창작문예’라는, 어디서 띄어 써야 할지 난감한 이름의 공모전에서 수상한 글이다. ‘과학기술창작문예’라는 무시무시한 단어는 SF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누군가의 의견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한다. 발안자를 모르다 보니 정확한 의도도 알 수 없지만, 그 시절 SF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아는 분들이라면 짐작은 하시리라 믿는다. 그 시기 이전에도 SF 팬이었음은 물론 번역도 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한국 SF가 어떤 파도에 오르내렸는지 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이 SF를 읽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다른 팬들과 함께 수없이 주고받았던 말이다. 육지가 보일 만큼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고 믿었던 때만 해도 지금까지 세 차례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해외 명작 SF들이 소개됐고,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절판되었다. 헛된 공상을 즐기는 사람들이란 얘기는 하도 들어서 아무 반발심도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던 참에 나는 직접 쓴 SF로 창작자가 되었다. 자신이 쓴 SF 덕분에 삶의 향방이 바뀌는 많은 분들과 비슷한 경험도 해보았다. 이 글은 내게 그처럼 묵직한 기억과 전환의 상징이다. 또한 외면받던 장르의 글쓴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직접 겪는 계기이기도 했다. SF를 비롯한 장르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완전히 잘려나가지 않은 옛 편견의 끝자락과 싸우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적지 않은 독자들이 장르문학의 가치를 잘 알고 즐긴다. 이야기를 만드는 입장에서 그보다 더 힘이 되는 일은 없다. 일일이 찾아가진 못하지만 모두 힘내어 이야기를 만드시고, 그 이야기를 즐겨 주시기를 바란다. <해부천사> #개인적인 숙제 #근미래 #공존 #음모 #끊임없는 범죄. 이 단편에 태그를 붙이면 그쯤이다. 앞서 출간된 작품집 《우리가 추방된 세계》에 실린 <백중>의 연작 속편이며, 전작과 마찬가지로 꽤 주저 없이 써내려간 범죄물이다. 처음부터 이야기 진행이나 인물상도 그에 맞게 골랐다. 내가 만들어 낸 주인공 가운데 가장 고민이 적은 인물일 것이다. 형사라는 직업은 실체가 명확한 적과 문제에 몸으로 부딪히는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골랐다. 범죄와 직면하기 쉽다는 점은 부차적인 조건이었다. 그리고 원수일 수 있는 존재와 함께 행동한다는 버디물의 공식도 조금 빌어왔다. 더 작위적으로 밀어붙일 생각이었다면 서낭과 연결된 순간부터 주인공은 길길이 날뛰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선택 상황에서 흔히 그러듯 합리화가 필요할 때마다 핑계를 찾는다. 핑곗거리를 고심하다 보면 침착해지기 때문에 의외로 정답을 찾는다. 그의 아내와 아이가 죽은 것은 서낭 탓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렇다. 이번 이야기에서도 평범한 궁리 덕에 실마리를 찾는 행보는 이어진다. 나는 그를 영웅으로 만들 생각이 없다. 모든 소설의 주인공이 다 영웅이라면 그도 영웅이겠지만 나는 최대한 그를 낮은 곳으로 끌어내릴 생각이다. 서낭의 유머 감각을 두고는 고민했다. 꽤 애쓴 끝에 서낭에게 코미디를 맡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인공지능을 자주 등장시키는 작가로서 이런 말을 하면 설득력이 있으려나 모르지만, 나는 인공지능의 의인화를 경계한다. 프로그래밍이 어떤 작업인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 인공지능이란 개념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서 흉내 내지 않는 유머 감각이란 인간미의 정점이다. 어느 모로 보나 서낭에게 유머는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의욕도 별로 없는 직장인 주인공과 비교하면 전능해 보일지 몰라도 서낭은 말단이다. 어떤 면에서는 주인공이 더 낫다. 적어도 그는 늘 마음속에 사직서를 품고 살며 집어 던질 기회라도 찾아오니까. 주인공의 운명이 어느 방향으로 구를지 결정됐으므로 그와 한몸인 서낭도 그 길을 피할 순 없다. 둘은 말단답게, 그리고 작가 때문에 더 고생을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끝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상대의 습성을 ‘암기’하고 반응할 수는 있겠지만. ‘한쪽이 인공지능이기 때문이지?’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저을 생각이다. 모든 사람이 서로 이해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여하튼 그런 속사정을 마음속과 프로그램 코드 속에 품은 채 이 둘은 몇 가지 사건을 더 풀어나갈 예정이다. <뇌수(腦樹)> 이 책에 실린 글 가운데 <우주의 모든 유원지>와 함께 쓰는 내내 신이 나고 즐거웠던 글이다. 영겁을 살아온 미래 노인이 제 몸을 지켜내는 장면을 꼭 넣고 싶어서 <우주의 모든 유원지>를 썼다면, <뇌수>는 나 홀로 ‘가상현실 프로젝트’라고 이름 지은 연작 중 하나다. 가상현실은 시간여행과 함께 SF 작가들이 애용하는 소재이자 배경이다. 그만큼 작품도 많아서 다들 어떡하면 나만의 글로 만들지 고민하는 소재다. 예를 들어 소설이자 영화인 <레디 플레이어 원>은 레트로 게임과 애니메이션과 영화의 추억을 고스란히 가져와서 특정 시대를 살아온 관객의 공감을 한껏 끌어냈다. 내 프로젝트는 그것보다는 더 보편적인 가상현실을 목표로 삼았다. (방금 여러분이 읽은 앞 문장이 가상현실 이야기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을 함축하고 있다. 보편, 가상, 현실. 이 세 단어 가운데 둘은 다른 하나와 정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가상현실은 진짜 현실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정보를 더 많이 다뤄야 한다. 현실과 아주 비슷한 가상이라면 사람의 힘만으로 운영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관리자는 아마도 인공지능이어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안에 사는 우리는 단순한 데이터 모음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관리자인 인공지능은 인간을 잘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뇌수의 세계는 완전한 낙원이다. 치렁치렁 장식이 달린 모자를 쓴 노인이 통치하는 그곳도 아니고, 천식을 유발할 수도 있는 흰 깃털을 굳이 견갑골 밑에 잔뜩 붙인 존재가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곳도 아니지만 평온하고 행복한 장소다. 관리자들이 거주민의 마음을 잘 알고 운영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면 딱 좋을 것 같다. ‘완전이란 불완전까지 포함해야 성립된다.’ 물론 모순이다. 현실에서 모순은 갈등과 파국을 부른다. 관리자라면 마땅히 불완전한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한편 그 불완전함이 한 명의 사람이라면, 그는 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한다. 관리자인 인공지능이 인간을 잘 알고 있다는 건 다른 말로 인간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또 하나의 모순이다. 여기에 관리자의 주인이 곧 주민이라는 당연한 원칙을 삽입하고, 사람처럼 자아가 분열한 인공지능을 첨가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 한 줌을 가상현실 깊숙이 묻어놓고 나서, 나는 비로소 만족스럽게 웃으며 키보드를 괴롭히던 양손을 풀어줄 수 있었다. 물질과 정보의 폭포가 사라지지 않는 번개처럼 지구를 향해 흘러내리는 광경은, 언젠가 꼭 독자께 드리고 싶었던 작은 선물이다.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주인공의 과거는 더 긴 글에서 밝힐 생각이다. <망령전쟁> 우리가 사는 세계를 범례에 따라 다양한 분포도로 머릿속에 그려보자. 물리에서 말하는 힘의 흐름만 볼 수 있는 분포도를 그릴 수 있을 테고, 온도가 같은 지점을 동일한 색으로 표기한 분포도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그림에선 나도, 여러분도, 기타 사물도 모양새를 잃고 힘이나 온도로 존재할 뿐이다. 어차피 상상 속 그림이니 더 추상적인 건 어떨까. 내게 영감과 암시를 주는 사물과 의미의 지도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영감도’를 조금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세상은 조금 독특한 우주다. 의미와 이미지들이 별처럼 빛나고 거기서 파생된 상상이 안개처럼, 은하처럼 존재한다. 그 모든 것들이 은색 실로 마구 이어져 관계를 맺는다. 이 우주는 한시도 멈추지 않고 변화한다. <뇌수>의 후기에서 언급한 ‘가상현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마다 가져온 별무리 가운데 하나가 <망령전쟁>이다. 발상은 간단했다. 두 가상현실 세계가 전쟁을 벌일 수 있을까? 있다면 어떻게? 왜? 차이점과 공통점은? 선택과 집중은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작업이지만 이야기에 따라 난이도에 차이가 있다. 전쟁과 가상현실은 그런 면에서 최악의 조합이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비극의 총합이고 가상현실은 포기와 새 시작을 동시에 품기 때문이다. 그 일부만을 확대하면 자칫 전쟁의 의미를 희석하는 우를 범할 수 있고, 적어도 그런 실수는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버거울 만큼 덩치가 큰 별무리를 오려내고 이야기 하나로 남기는 작업이 아주 오래 걸렸다. <망령전쟁>에서 참상과 모순은 글이 시작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다. 누가 이기든 모두가 살 순 없다. 가혹한 환경 속에서 두 서버 국가는 똑같이 약자다. 주인공의 고민도 바로 그 지점에 자리한다. 지도자이긴 하나 그는 도망칠 수도 없기 때문에, 사실 그를 약자로 만드는 것은 책무와 같은 나라 국민의 생명들이다. 설사 그 사람들이 전자정보로 존재할 뿐이어도 생명임에는 틀림없다. 물리적인 충돌에서 사라지는 건 살아 있는 병사가 아니라 드론이어서 다행이지만, 그 대신 패배는 곧 전멸을 의미한다. 양상이 바뀌어도 전쟁은 여전히 거대한 비극이다. 역사 속 모든 전쟁이 그랬듯이 미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재건이 필요하다. 주인공은 홀로 그 커다란 짐을 짊어졌고 성공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나는 뒷이야기를 더 잇지 않을 테지만 그에게 바라는 점은 있다. 재건에 성공하고 먼 훗날 서버 국가의 영웅이 되더라도 그게 자랑거리는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기를. 현실에서 혹독한 전후 시절을 겪었다는 점만으로 특권이라도 가진 양 목소리를 키우는 어떤 사람들과는 다르기를. <유일비> 희망은 차갑다. 뜨거웠다면 금세 화학반응을 끝내고 없어졌을 테니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꼭 구체적인 무언가가 함께 해야 할 필요는 없다. 내 마음을 이끄는 무언가가 저기 어디에 있다는 실마리만 보여도 충분하다. 내가 평상시에 품고 있던 그 생각을 다시 확인한 건 우연히 링크를 눌렀다가 보게 된 어느 실시간 인터넷 방송 때문이었다. 다락인 듯 보이는 자그마한 방에서 일본 학생이 평범한 외출복을 입은 채 웹캠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는 두툼한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기고 잠들었다. 방송은 켜둔 채로. 웹캠은 학생의 정수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뭐 이런 방송이 다 있나 싶어 화면을 닫으려다가 접속자 수를 보곤 놀랐다. 5천 명? 그중에는 그리 선명하지도 않은 외국 학생의 가르마를 보고 비뚤어진 상상을 하는 한심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화면 옆에서 가끔 움직이는 채팅창을 보면 그 채널은 그런 작자들이 모이는 장소가 아닌 거로 보였다. 호기심이 생겨 화면을 백그라운드로 돌려놨다가 깜빡 잊었다. 새벽 4시쯤 컴퓨터를 끄려다가 그 점을 깨달았다. 학생은 여전히 숙면 중. 접속자 수는 별 차이가 없었고 채팅창에도 일상적인 대화가 조금 오갔을 뿐이었다. 인적도 거의 없는 외국 어느 강을 24시간 비춰주는 실시간 영상이나 하루에 기차가 여남은 번 지나가는 적적한 철로 한 토막을 종일 보여주는 방송에도 접속자가 그리 많다는 건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할 수 있었다. 게시판과 온갖 채팅앱과 인기 크리에이터의 실시간 방송 채널은 욕망과 환호와 원색적인 비난이 난무하는 장이다. 여러 해 전부터 그 속에 조작세력들까지 가세했다. 옛 세대 사람들도 내용에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TV를 켜놓고, 악역 배우를 죽이네 살리네 핏대를 올리긴 했다. 그런데 집과 직장 밖으로 걸어나가 타인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는 요즘, 관계의 장이 온라인으로 크게 옮겨간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온라인상의 관계만 남아도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온라인 관계만이 남으면 그 속에 아웃사이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목격했듯 아웃사이더는 인사이더보다 훨씬 더 용감할 수도 있고, 누구보다 현명할 수도 있다. 악을 쓰거나 폭력을 휘두른다고 강한 사람이 아니듯, 자신과의 투쟁이 세상에서 제일 힘겨운 사람이야말로 누구보다 현명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잔잔한 강물에 넋을 놓고, 정지화면이 아님에도 움직임 하나 없는 풍경을 보고서야 자신만의 생각을 다질 수 있는 사람들을 나는 ‘힐링’하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을 셈이다. <유일비>는 그런 생각에서 써내려간 이야기다. <유가폐점> 4차 산업혁명과 특이점이 화제가 되기 시작한 것도 한참은 지난 것 같다. 이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제 할 일과 연구에 매진하는 분들은 여전하고, 스마트폰이 별 무리 없이 삶에 녹아들었듯 보통 사람들은 세상이야 늘 바뀐다는 사실에 얼른 적응한 모양이다. 한껏 과장된 광고나 사기성 투자 열풍에 휩쓸린 뒤 소식이 없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본래 SF를 즐기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특이점이라는 (가상의) 시점을 다각도로 상상했다. 그들이 논하던 특이점은 사람이 첨단 기술 덕분에 상상을 능가하는 힘을 갖고, 육체와 어느 수준 이상으로 결별하고, 그 덕분에 한계를 벗어나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는 어느 순간이었다. 특이점에는 거의 반드시 초월이란 말이 따라붙었다. 특이점은 SF의 세부 장르를 나누는 기준이기도 했다. ‘특이점 이후를 다룬 SF’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유가폐점>은 내가 특이점 이후 SF에 대해 갖는 생각이 너무 솔직하게 드러난 글이다. 솔직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후기에 쓸 법한 얘기가 글에 너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살면서 ‘초월’이란 개념을 꽤 자주 접한다. 자신이 신과 직접 소통하며 그 화신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괴짜들을 보자. 그는 인간을 초월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붓다는 각성 단계를 겪었다. 비록 깨달은 뒤의 활동은 붓다와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차이가 나긴 하지만, 중2병이라는 말의 뿌리인 각종 일본 만화 속 주인공들도 나름 각성은 한다. 초월했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이들은 그 후 어떻게 살까. 신과 통했다는 사람은 여전히 신도에게 돈을 걷는다. 만화 속 주인공은 몸 속에 내재된 힘을 발현시키고는 본격적으로 (특수효과를 잔뜩 덧붙여서) 주먹질을 한다. 나는 내적 수련을 오래 하지 못했기 때문에 붓다가 각성 후 어떤 의식 단계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밖에 적지 않은 창작물 속에서 초월 이후는 ‘상상할 수 없으므로 여기까지’라는 숨은 말과 함께 대미를 장식한다. 가끔 내 SF를 평해주시는 분들의 지적은 정확하다. 나는 특이점 이후를 즐겨 다룬다(특히 이 작품집은 기획에 따라 유난히 그런 이야기가 모여 있다). 그럴 때마다 ‘끝’이란 말 대신 ‘초월’을 쓰지 않는 걸 첫 목표로 삼는다. 어느 유명 게임 캐릭터의 입을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초월은 삶이 사라지는 지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과 이야기는 꾸준히 노력하고 단계를 밟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만든 여러 이야기에는 같은 문제에 다른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적어도 그런 모습을 만들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그렇게 말해놓고 이 단편의 주인공(들)인 닐도 일종의 초월을 한 셈 아니냐고 묻는다면, 아주 겸연쩍게,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비록 연재를 마치지는 못했지만 여러 해 전 어느 잡지에 나누어 실었던 악마 집안 이야기가 <유가폐점>에 이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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