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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완적 (阮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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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영회시>

완적(阮籍)

완적은 위진 교체기의 최고 시인이며 죽림칠현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자가 사종(嗣宗)이고, 건안 15년(210) 진류군 위씨현(陳留郡 尉氏縣, 지금의 허난성 카이펑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건안 문학을 대표하는 건안칠자 가운데 한 사람인 완우(阮瑀)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후한과 촉 그리고 오나라가 정립된 삼국 시대였는데, 후한은 사실상 조조의 수중에 있었다. 220년에 후한이 멸망하고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위나라를 세웠다.
완적이 두 살 때인 서기 222년에 부친인 완우가 죽자, 당시 완씨는 명문대족(名門大族)이긴 했으나 청렴결백한 아버지를 둔 관계로 생활이 풍족하지 못했고, 홀어머니를 위해서 어릴 적부터 효도를 몸에 익혔다. 그는 여덟 살 때 이미 좋은 글을 썼고, 이후 독서에 매진해 수개월 동안 두문불출하기도 했으며, 열네댓 살 때에는 ≪시경≫과 ≪서경≫ 등의 유가 경전에 탐닉해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 같은 유자(儒者)가 되기를 꿈꿨다. 그리하여 제세(濟世) 의지도 확고하게 갖췄다. 그는 완우의 아들이라는 점과 종형인 문업(文業)이 그를 인재로 보았다는 이유로 일찍부터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데 벼슬과는 항상 거리를 두었다. 서른두 살(242) 때 태위(太尉) 장제(蔣濟)의 추천을 받았으나 오히려 언짢게 여기고 거절하다가 화를 자초할지도 모른다는 주위의 권유로 잠시 직무를 보다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서른여덟 살(248) 때는 상서랑을 지내다 당시 최고의 실세인 조상(曹爽)의 참군(參軍)으로 부름을 받았으나 역시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한 해가 지나 고평릉 사건으로 조상이 죽자 세상 사람들은 그가 선견지명이 있다고 얘기했다.
249년 고평릉 사건을 계기로 조씨 권력이 사마씨로 넘어간 후, 이를 다시 되찾으려는 조씨와의 싸움이 더욱더 치열하게 전개됐다. 이에 명사들은 현학과 청담이 성행하고 피세 사상이 만연한 사회 분위기에 따라서 자신들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술과 거문고 그리고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죽림칠현이 그 대표적인 예다.
사마씨가 정권을 잡은 후 위나라 태부(太傅)가 된 사마의(司馬懿)는 완적을 종사중랑(從事中郞)으로 발탁했고,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가평 3년(251)에는 관배대장군(官拜大將軍)인 사마사(司馬師: 사마의의 장남)가 그를 종사중랑으로 삼았다. 정원 원년(254)에는 사마사가 주군(主君)인 조방(曹芳)을 폐위해 제왕(齊王)으로 앉히고 조모(曹?)를 옹립한 후 그를 관내후(關內侯)로 봉했다가 다시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자리를 옮겨 주었다. 다음 해인 정원 2년(255) 정월에 관구검(?丘儉)과 문흠(文欽)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나고, 다음 달인 2월에는 사마사가 병사해 그의 동생인 사마소(司馬昭)가 대장군의 지위를 이어받았다. 사마소는 완적을 동평상(東平相)에 임명했으나, 그는 열흘도 채 못 되어 그만두고 돌아왔다. 그래서 사마소는 그를 다시 대장군종사중랑으로 임명해 왕침(王沈) 등과 더불어 위서(魏書)를 편찬케 했다. 그 후 완적은 보병 병영에 술 잘 빚는 주방장과 좋은 술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청해 보병교위(步兵校尉)가 되었다. 이때부터 완적은 본격적으로 반예교적 방탕 행위를 시작했다. 그러나 완적 자신은 의도적인 반예교적, 반인륜적 방탕 행위를 자행했지만, 아들만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완함(阮咸: 완적의 조카) 하나만으로도 족하니,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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