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 왕조가 멸망을 앞둔 거의 마지막 세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가 살았던 17세기 전후는 인류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동서양 문명의 본격적인 접촉과 교류가 이루어졌던 시기다. 가정제 말에 태어나 만력제와 천계제를 거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에 이르는 그의 짧지 않은 인생 역정은 당시를 살았던 한 전형적인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자가 자선(子先), 호가 현호(玄扈)로, 남직례(南直?) 상해현(上海縣)에서 태어났다. 만력 23년(1595), 나이 서른세 살 때 그는 광동 소주(韶州)에서 훈장 노릇을 하다가 처음 서양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고 천주교와 서양 과학에 관한 초보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마테오 리치가 출판한 세계지도인 《산해여지도》를 접하게 되었다. 만력 25년(1597) 향시(鄕試)에 합격한 그는 만력 28년(1600) 봄, 북경에 회시(會試)를 보러 가는 도중 남경에 들러 마테오 리치를 만났으며, 이후 그와의 교유가 시작되었다. 1603년 그는 남경으로 리치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한 대신, 선교사 로차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듬해 그는 마흔두 살이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회시에 합격해 한림원서길사가 되었다. 만력제 말기 환관 위충현(魏忠賢) 무리의 전횡과 횡포 속에서도 그는 사직과 휴직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소신을 지키면서 그들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현명하게 피하며 적절히 처신했다. 그리고 결국 숭정제 때에 다시 발탁되어 재상의 지위라고 할 수 있는 대학사(大學士)까지 올랐다.
서광계는 회시 합격 후 북경에 거주하게 되자 마테오 리치 등 서양 선교사들과 교유하면서 본격적으로 천문, 역법, 수학, 수리, 측량 등에 관한 서양 학문을 탐구했다. 1607년 그는 마테오 리치와 함께 작업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리》를 번역한 것을 비롯해 《측량법의》, 《간평의설》, 《태서수법》, 《농정전서》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서양 역법을 번역한 《숭정역서》는 1645년에 반포된 ‘시헌력(時憲曆)’의 토대가 되었는데, 이를 전체적으로 총괄 지휘한 것도 서광계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다.
이런 과학 기술 분야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업적을 고려해 볼 때, 그를 ‘근대 과학의 선구자’라 부르는 것도 지나치지 않다. 그는 공자(孔子)의 신봉자인 동시에 천주교도이기도 했으며, 동시대 그 누구보다 서양의 학술에 정통했던 인물이었다. 당시는 서양이 천문, 역법, 수학, 측량, 화약 무기 등의 분야에서 중국을 추월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서광계는 편견 없는 지적인 열정을 가지고 동서양 사유와 학술의 통합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던 열린 지성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테오 리치가 당시 서양 지식인을 대변하는 사람이었다면, 동양 지식인을 대표할 수 있는 최초의 세계인은 바로 서광계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