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의 글쓰기
문학적 글쓰기는 문학이라는 모태에서 장르의 씨앗을 받아 태어난다. 그러나 글쓰기는 아버지 장르를 죽이고 다만 문학을 아내로 삼는다. 장르의 피를 부인하며 애써 어미 문학을 아내로 삼아 하나의 형식을 낳으려는 모순은 얼마나 오이디푸스적인가. 글의 형식에서 장르의 유전을 벗어날 수는 없다. 문학적 글쓰기는 부친 살해의 죄의식을 어머니이자 아내인 ‘문학’에 대한 사랑으로 갚으려는 불가능한 시도다.
한 시대를 사는 개인의 삶은 얼마나 역사적인가. 가난이나 불화, 사랑이나 열망은 정치나 전쟁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이다. 개인의 실존이란 호수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동심원처럼 피었다 사라진다 해도 그 기억의 흔적들은 또 얼마나 역사적인가. 실존은 역사의 그릇에 담겼다가 수채통 속으로 버려진다.
시는 형식에서나 정신에서나 무서운 매혹이다. 오르페우스의 영혼에 숨겨진 죽음의 검은 구멍이 바깥과 통한다는 걸 우리는 직감한다. 홀로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문득 멈추었을 때 존재는 하나의 귀가 되어 타자의 목소리들이 울려 나오는 관이 된다. 존재 안에 타자의 음성들이 검은 관을 타고 들어와서 놀다 간다.
시, 아버지, 역사, 지푸라기 인형, 이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모어(langue maternelle)에서 발생한 문학이라는 언어 행위가 부어(langue paternelle)의 형상으로 모어 속에 생식하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는 모순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삶과 역사 형식의 형용모순. 오르페우스가 지옥으로 찾으러 간 아내는 어쩌면 그의 어머니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형식과 말이 역사나 흔적으로 의미 있게 남더라도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숙명으로서의 삶과 사랑만이 뜨겁게 피었다 사라져 갈 뿐이다.
결국 삶은 사랑의 힘으로 죽음과 대결하는 결투다. 시는 말의 힘으로 분열된 영혼을 구제하려는 랩소디이자 죽은 영혼을 위무하려는 레퀴엠이고. 한 세월을 살고 사라지는 삶의 노래는 광시곡과 진혼가가 뒤엉킨 넋두리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