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문리대 독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빈 대학에서 수학. 한양대학교 교수 역임.
역서로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릴케), 《다니엘라》, 《선을 넘어서》, 《백수선화》,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때》 (이상 루이제 린저),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카로사), 《히페리온》(F. 횔덜린) 등이 있다.
| 이 책을 읽는 분에게 |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전유럽 문화를 단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한 명의 범유럽인이 되었다. 그는 독일어, 체코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와 덴마크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그로 인하여 국가간의 문화 중계자가 되었다. 미켈란젤로와 페트라르카, 옌스 페터 야콥센, 브라우닝, 발레리, 말라르메와 앙드레 지드 등의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했으며 독일어 이외에 체코어와 러시아어, 프랑스어로 시작(詩作)도 했다.
시인 릴케는 1987년 12월 4일에 프라하에서 태어났으나 순수하게 독일적인 교육을 받았고 일생 동안 자기 집을 가져보지 못한, 고향을 잃은 세계 시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였으나 퇴역 후에는 고급 철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냉랭한데다 고집이 센 여자로 릴케를 어릴 때부터 여자처럼 키웠다. 그가 편지에서도 여러 번 고백한 바와 같이 그의 성격이 이런 어머니의 영향 밑에서 독특한 색조와 여성의 신비와 같은 경향을 띠게 된 것도 오로지 어린 시절의 특수한 환경 때문이었다.
양친이 이혼한 수로 릴케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성 폴텐과 메리시 바이스키르헨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속에 잘 나타나 있다. 거기서 1886년에서부터 1890년까지 5년 간이나 고통스런 생활을 감내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교가 되게 하려던 부친의 꿈은 그가 육군 사관 학교에 입학한 해에 좌절되고 말았다. 릴케는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자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그는 도나우 강변에 있는 린츠의 실업학교로 적(籍)을 옮겼으며 거기서는 성적도 꽤 좋은 편이었다. 학급에서 2등을 했고 교장인 에펜베르커 박사의 50회 생일을 기념하는 시를 써서 절찬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 17세였던 릴케는 무언가 압박감을 느끼며 시인으로 일생을 보내겠다고 결심했던 것 같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나자 실업학교 교육은 전혀 무익한 것으로 여겨졌다. 실업가나 은행원이 된다는 것은 고려할 여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향 프라하에 돌아가서 다시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치르고 프라하 대학에 입학했으며 뒤엔 뮌헨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이런 공부도 결국은 그를 실망시켰다. 그리하여 여기서부터 릴케의 영원한 정신적인 방랑이 시작된다.
일찍이 릴케는 어떤 실제적이고 목표 있는 생활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소란한 세상에서 도피하여 수동적이고 겸허하며 조용히 사색하는 자세로 모든 사물·별·돌멩이·식물· 동물·인간들을 대하게 되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와 똑같은 가치를 지니며, 그는 자신이 그런 것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 그런 것들 속에도 신은 직접적으로 존재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세계와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신을 찾으려고 애썼다.
“나는 그런 사물들 속에서 신을 찾고 있다. 그들에 대해 나는 친절하게 형제와 같이 대하고 있다”
라고 쓰고 있다. 그의 원초적인 체험은 바로 소란스러운 세상 가운데서의 고향을 잃은 자, 고독한 자의 감정이다.
“내게는 지금 고향이 없다. 그렇다고 그걸 잃은 적도 없다.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 세상에 나를 낳으셨다. 그리하여 이제 나는 세상에서 더욱더 깊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있다. 내게도 행복이나 슬픔이 있다. 그러나 그것들도 그 나름대로 외로우며…… ”
라고 그는 쓰고 있다.
릴케의 사랑은 F.W. 니체에게서 보는 남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약한 자, 불구자, 가난한 자, 경험한 자, 평정한 자, 특히 어린 처녀들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는 모방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독특한 음조를 얻었으며, 말하기 어려운 것과 예감된 것만을 상징적인 수법으로 쓰던 표현주의를 뛰어넘었다.
그의 최초의 시작(詩作)들은 1894년에서 1898년 사이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가 1913년에 《제1시집》이라는 제목으로 합본되었으며, 1909년에는 《구(舊)시집》이 출간되었다. 그 시들은 모두가 외계에 대한 형제애와 같은 헌신과 신비적인 감정 이입 능력으로부터 무엇인가 경험되지 않은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 시기인 1899년에는 또한 서정적인 산문 소설 《기수(旗手) 크리스토퍼 릴케의 사랑과 죽음의 노래》라는 작품이 나왔다. 시인은 이 작품 속에서 1663년에 터키와의 전투에 참가하여 헝가리에서 전사했다는 한 젊은이의 전쟁과 사랑의 짧은 체험을 얘기하고 있다. 구름이 흘러가는 듯한 리듬 속에서 한 젊은이의 운명이 서정적이고도 마력적인 장면을 통해서 하나하나 독자들에게 전개되고 있다.
릴케의 동유럽에 대한 체험은 1899년과 1900년에 있었던 두 번의 러시아 여행이 주축을 이룬다고 할 수가 있다. 릴케는 그 당시에 여자 친구인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와 동행을 했다. 두 사람의 정신적 교류는 루 살로메에게 보내는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아무튼 릴케보다 열세 살이나 연상인 이 여인은 러시아의 장군과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으며, 릴케와 친교가 있기 전에 이미 니체와도 가까운 사이였고 서아시아어학 교수인 F. 칼 안드레아스와 결혼한 여자였다. 이 교양 있고 정신 세계가 깊은 여인에게서 릴케는 러시아어를 배웠으며, 여행 기간에 그들은 톨스토이를 방문했고 러시아 작은 마을의 농가에서 거처하기도 했다. 광활한 들판과 끝없는 러시아의 풍경과 농부들의 어린애같이 즐거운 모습, 숱한 성자상(聖者像)이 있는 러시아 정교회(正敎會)들은 릴케로 하여금 종교적 체험을 하도록 했는데, 그는 그 체험을 통해서 중세적인 신비주의와 범신론적인 역본설(dynamism)을 결합하였다.
그는 갑자기 신은 자기와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그의 모든 구성 요소 어디에나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저 위에 있는 피안(彼岸)에서가 아니라 이 아래 세계에서 비로소 신을 찾게 된 것이다. 이제 신은 그에게 영광스러운 존재, 은둔자, 질서를 부여하는 자, 행복을 가져다 주는 자로서 나타나게 된다. 신은 광활한 러시아의 풍물처럼 크고도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릴케는 사물의 외적인 매력을 통해서 불러일으켜지는 정조만을 포착하는 게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있는 신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시인의 사명이라고 느끼게 된다. 이런 두 번의 정신적인 발전을 통해서 《하느님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13편의 짤막하고도 동화적인 단편을 모은 것으로 소재는 러시아 민속에서 구했다. 거기서는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모든 사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러시아 여행의 두 번째 수확은 《시도시집(時禱詩集)》인데 이것은 수도생활편·순례편·빈곤과 죽음편 등 세 편으로 나누어져 1905년에 완간을 보게 되었다. 한 러시아 승려가 기도와 찬가, 참회와 주술 속에서 이름 없는 자인 신을 찾고 있다. 릴케는 여기에서 후기 낭만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어서, 일종의 신비적인 세계성을 지닌 경건성과 직접적인 신의 내재화에 대한 지복(至福)을 느꼈고 인간 영혼의 깊이와 범신론적인 신비관을 얻었던 것이다.
릴케의 북유럽에 대한 체험은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여행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900년에서 1902년까지 브레멘과 함부르크 사이에 있는 북독일의 소도시 보르프스베데에 체류한 일이다. 보르프스베데는 화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었다. 여러 예술가들과 어울려 살면서 릴케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어, 그의 일생에 걸친 방랑 생활도 매듭짓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조차 믿을 정도였다.
릴케는 거기서 여류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와 결혼하여 루트라는 딸을 낳았으며, 그때부터는 신문기자로서 착실하게 소시민적인 생활을 꾸려보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나 그런 릴케의 노력도 이내 끝이 나고 그는 다시금 옛날의 방랑 생활로 되돌아가게 된다. 부인 클라라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자들은 이 부부간의 정신적 교류와 두 사람의 부부 생활을 엿볼 수가 있겠다.
“고독은 모든 악센트를 잃어야 하며 어떤 예외적인 가치나 의무감도 잊어야 하오. 그리고 나를 찾아오는 사념들과 아무도 없는 데서 단둘이서만 만나야 하오.”
훗날 릴케는 화가촌의 여러 벗에 대한 우의를 기념하기 위해 《보르프스베데》라는 제목으로 화가인 오토 모더손, 프리츠 막켄젠, 프리츠 오베베크, 하인리히 보겔러 등에 관한 서정적인 수필집을 냈다.
러시아 여행의 체험에서 얻어진 릴케의 시들이 신비적이고 범신론적인 감정의 압박을 받아 사물 속에 녹아든 무언가 불가시(不可視)의 것이었다면, 그 자신이 찾아낸 덴마크의 시인 옌스 페터 야콥센의 영향과 자연에 성실하려고 애쓰는 여러 화가들의 영향을 받고 난 그는 다시 세계로 향한 길을 찾았으며 화가의 눈으로 현실적인 형상들을 응시하는 능력을 얻었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조각이 가진 구성과 조성력을 지니게 된다.
1902년의 《형상시집(形象詩集)》은 1907년에 나온 《신시집(新詩集)》의 전조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들은 모두 ‘보르프스베데 시대’에서 얻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사물을 꿰뚫어 보는 눈이 열렸으며 신적인 신비주의가 사물적인 신비주의로 넘어가게 되었다.
페터 야콥센의 영향에 대해서는, 독자들은 에서 릴케 자신의 입을 통해 이 위대했던 덴마크의 시인의 세계에 근접하게 될 것이다.
릴케의 서유럽에서 얻은 체험은 1902년 8월 프랑스로의 이주라고 하겠다. 그 후 그는 12년간 파리에서 살았고, 파리는 그의 정신적인 고향이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위대한 스승인 조각가 로댕을 알았고 화가 세잔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사물들만이 내게 말을 걸어옵니다. 로댕의 사물들, 고딕식 대성당의 사물들, 완전한 사물들만이 그렇습니다. 이런 사물들은 내게 활동적이며 생명이 있는 세계를 제시해 줍니다…….”
파리에서 그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죽음·파멸·궁핍·몰락·고통과 질병·공포 등이 그것이었으며 그 체험을 통해서 1910년에 《말테의 수기》가 나왔다. 이 작품은 릴케 자신의 자서전적인 산문 소설로서 한 절망적인 현대인의 고백이라고 하겠다. 릴케가 편지에서 말한 대로, 이 작품은 너무나 위대한 내적 고백이므로 이 작품을 쓴 뒤에 다른 것을 쓴다는 것부터가 무의미할 정도였다.
“이제 저는 일을 치르고 난 뒤의 라스콜리니코프와 비슷한 기분입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책을 썼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두렵기까지 합니다.”
이 소설은 말테의 유고로서 남아 있는 단편적인 스케치, 회상, 일기, 편지들을 아무런 순서도 없이 모아놓은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소설의 형식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바로 그런 무형식에서 직접적인 것을 느끼게 한다. 말테라는 청년은 병원을 지나다니고 거리에서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괴로움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불안과 신에 대한 동경을 체험한다. 이런 온갖 공포와 절망은 말테를 갈기갈기 찢어서 거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나, 그에게는 오히려 그런 절망의 심연에서 삶에 대한 긍정이 나오며 생(生)과 사(死)의 통일이 열리고 신에 이르는 길이 열리게 된다.
파리에서의 또 다른 체험은 로댕과 세잔과의 친교이다. 릴케는 이들에게서 예술에 대한 엄격한 형식과, 휴식이 없는 고된 창작에 있어서의 수련에 대한 경외심(敬畏心)을 배운다. 일에 모든 정력을 바치는 이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릴케도 사물에 대한 겸허하고 끈기 있는 헌신을 통해서 그 사물의 영혼을 파악하려고 애쓰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묘사한 사물의 핵은 가끔 인간 실존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어 그의 시 이 햇빛을 보게 되었는데, 철책 뒤에 갇혀서 사는 그 동물은 바로 땅에 발이 묶인 인간의 상징이다.
소위 릴케의 물상시(物象詩)는 2부로 나누어져 《신시집》이라는 표제로 1907년에서 1908년 사이에 나오게 되었는데, 그 중 2부는 로댕에게 봉정(奉呈)된 것이다.
릴케의 마지막 결실은 남유럽에서의 체험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을 여행한 후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체재 이후로는 오랜 침묵이 따랐는데, 그 동안에 릴케는 번역에만 손을 대고 있었다. 그는 1912년에 투룬 운트 탁시스 영주 부인의 초청으로 트리에스트에 있는 그녀의 두이노 성(城)에 손님으로 머무르게 된다. 거기에서 다시금 새로운 창작기가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가 《두이노의 비가》였다.
그 당시의 여주인은 그것이 씌어진 전말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오랜 침묵 끝에 드디어 느닷없이 새로운 하루가 덮쳐 왔다. 침잠에서부터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킨 것이다. 마치 냇물이 살랑거리는 소리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를 부르고 있는 듯이 말이다. 그는 귀를 기울이며 누구냐고 중얼거렸다. 그리곤 언제나 갖고 다니는 노트를 꺼내서 쓰기 시작했다. 밤에는 이미 제1비가가 완성되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제2비가가 나왔으며 제3비가도 곧 계속되었다.”
제4비가는 1915년에야 완성되었다. 이 후로는 그는 다시 오랜 침묵을 지키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릴케는 빈에서 군무에 종사했고 전쟁이 끝난 후 스위스로 이주했다. 거기서 조그마한 성을 얻어 죽을 때까지 살았다. 그곳에서 1922년에 《오르페우스에게 드리는 소네트》를 출간하였으며, 1923년에 《두이노의 비가》를 완성하였다.
《두이노의 비가》에서 시인의 눈은 보다 높은 세계, 인간의 내부에서 투영되어 사물을 변형시키며 현시(顯示)하는 신의 세계를 보았다. 그리하여 세계의 질서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정립했고 현실상을 내보였다. 횔덜린과 흡사한 세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게 된 것이다. 《오르페우스에게 드리는 소네트》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현재 속으로 불러내어 현실의 모순을 재결합시킨다. 이리하여 시인은 잃었던 통일을 예술을 통해 다시 찾게 되며, 신과 세계가 하나로 느껴지는 독특한 내부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릴케는 1926년 12월 29일에 제네바 호반에 있는 요양소에서 숨을 거두었고 오버바리스에 있는 조그만 교회에 묻혔다.
릴케만큼 시어의 서정적인 표현 가능성을 넓혀 준 시인은 거의 없다. 시어의 압축을 통해서 표현 영역을 넓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귀로 들을 수 없는 것까지 표현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릴케가 그의 작품 속에서 택했던 주제는 사랑과 죽음의 문제였다. 그의 독특한 애정관은 애인을 자유롭게 해주며 소유욕을 버린 사랑, 억제된 사랑, 먼 곳에 대한 에로스란 관념 속에 집약되어 있다. 죽음이란 것이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서 익어 그 열매의 핵이 될 때, 시인은 죽음을 가장 잘 파악할 수가 있다고 여겼다. 릴케에게 있어서는 죽음도 우리들 삶의 다른 면에 불과했다. 그 면은 어둠에 싸여 우리의 반대쪽에 놓여 있을 뿐이다. 어둠에 싸여서 우리와 반대쪽에 놓여 있는 그 면과 불빛에 드러난 다른 한 면을 함께 연결할 때만이 우리의 ‘존재의 원(圓)’, 다시 말해서 완전한 존재, 즉 전체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삶과 죽음과의 통일이란 관념을 갖고 삶의 다른 면에 불과한 죽음조차도 사랑해야 한다. 이런 통일에서만 삶의 온갖 모순이 긍정될 것이며 아름다움과 공포, 즐거움과 괴로움까지도 긍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들 존재의 모든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삶에 있어서의 공포까지도 결국은 긍정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릴케의 사후에 출판된 서간집은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바로 릴케 자신의 본질과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가 쓴 편지들은 수신인을 의식하고 쓴 것이 아니었다. 내적 고백 그 자체였다. 그것은 신과 세계에 대한 귀의(歸依)를 통해서 우주 속에 인간의 위치를 설정하려고 애쓴 노력의 집약체였다.
그의 방대한 편지를 전부 우리말로 옮긴다면 더없이 기쁜 일이겠지만 지면의 제약과 본인의 부족으로 우선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Briefe an einen jungen Dichter)》와, 릴케의 정신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던 몇 명의 여인들에게 보낸 편지만을 골라서 옮겼다. 이 서간문들은 릴케의 문학 세계에 접근하려는 사람이나 장차 문학을 지망하려는 사람, 그리고 마음속에서 시를 쓰는 고독한 젊은이들에게 릴케만이 갖는 영혼의 목소리를 들려줄 것이다.
번역에 쓰인 텍스트는 인젤 출판사(Insel Verlag, Frank furt am Main)의 1967년도 판이며 편집에 있어서는 수신인별로 묶은 다음에 다시 연대순으로 해서 이 시인의 정신적 발전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