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원[柳宗元, 773∼819, 자(字) 자후(子厚)]은 하동[河東,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용지(永濟)] 지방의 명문 대족 출신이었다. 네 살 때 벌써 고부(古賦) 14편을 숙독했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주를 보여 ‘기동(奇童)’이라고 불렸다.
그는 덕종 정원 9년(793)에 스물한 살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하고, 이어서 정원 14년(798)에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해 집현전서원정자(集賢殿書院正字)에 임명됨으로써 벼슬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는 부패한 관리들이 정권을 전횡하는 정치적 암흑시대였는데 유종원은 몇몇 동지들과 함께 당시의 정치적 폐단을 개혁하려는 열망을 품고 정치 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순종(順宗) 영정 원년(805)에 조정을 장악하고 정치 개혁을 주도하던 왕숙문(王叔文)이 유종원의 이러한 의지를 알아보고 그를 일약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그해 8월에 자신들의 권력과 이익을 침해당한 환관(宦官)과 번진(藩鎭) 및 기타 보수파 인사들의 반격을 받은 순종이 물러나고 헌종(憲宗)이 즉위함으로써 ‘영정혁신(永貞革新)’이라고 불린 왕숙문의 정치 개혁이 100여 일 만에 끝나 버렸다. 영정혁신의 핵심 인사들은 모두 원지로 폄적(貶謫)되었고 그 이듬해에 영정혁신의 주도자였던 왕숙문이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유종원은 영정 원년(805) 9월에 소주자사(邵州刺史)에 임명되었다가 부임 도중인 11월에 다시 영주사마(永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이때 유종원과 함께 영정혁신의 동지였던 유우석(劉禹錫)·위집의(韋執誼)·한태(韓泰)·진간(陳諫)·한엽(韓曄)·능준(?準)·정이(程異) 등도 모두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사마로 쫓겨났다. 이것이 이른바 ‘팔사마 사건(八司馬事件)’이다.
유종원은 약 10년 동안 영주에 머물면서 아열대 지방인 영주 지역의 이국적인 산수와 풍토를 몸소 겪어 보고 그곳 민중의 삶의 애환을 들여다본 후 그것을 시문으로 승화시켰다.
헌종(憲宗) 원화 10년(815) 봄에 유종원은 도성으로의 소환령을 받아 재기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안고 장안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해 3월에 바로 유주자사(柳州刺史)에 임명되었다. 그는 풍속도 다르고 말도 알아듣기 힘든 유주에서, 풍토병의 발병 요인이 되는 독기인 장기(?氣)와 싸워 가며, 농작물의 수확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학교를 열어 후진을 양성하며, 노비를 해방해 억울한 백성이 없게 하는 등 여러 가지 선정을 베풀었다.
다시 5년이 지난 원화 14년(819)에 대사면령이 내려져 유종원도 조정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유주에 머무는 동안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그는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조서(詔書)가 유주에 도착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향년 4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