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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출간을 '틈타' 김연수 작가와 인터뷰를 가졌다. 가을 마다 신작을 내고 싶다는 그의 말처럼 <밤은 노래한다> 이후 1년 만의 일이었다. 소설집의 제목부터 그가 사랑하는 여인들, 별다섯 개짜리 작가와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갔다. 영화 출연의 뒷 사정, 준비중인 신작 소식까지 우연에 우연을 거쳐 필연에 이르는 이야기들을 만나 본다.
(인터뷰 : 알라딘 김재욱, 금정연)
알라딘 :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 해요. 이전 작품집의 경우 수록된 단편과 무관한 제목을 지어오셨지요. 그런데 이번엔 표제작 개념이라고 해야 할까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그대로 단편집의 제목으로 선정하셨는데요. 김연수 : 네, 이전엔 하나의 제목을 정해두고 거기에 맞는 주제를 따라 쓴 작품들을 모았는데요, 이번엔 이렇다 하게 주제라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말 그대로 작품집이었기 때문에...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단편집 제목으로 선택한 것은 물론 그 제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알라딘 : 그러고 보면 이전에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이라고 연재된 장편은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으로 나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연수 : (웃음)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이라고 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그게 무슨 뜻인지 확 와 닿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 마침 출판사에 갔더니 외국출판사 편집장이 와 있었어요. 그 사람에게 한번 제목을 보여주었지요. 저는 영어 제목으로 'Every, One'이라는 제목을 생각해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혀 감이 안 온다, 라고 했죠. 콩글리시였던 거예요. (웃음) 알라딘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사실 ‘네가 누구건 얼마나 외롭건’이었죠. 김연수 : 네, ‘-건’ ‘-든’ 뭐 되는대로. (웃음) 알라딘 : 별다른 주제 없이 쓰셨다고는 하지만 미국인 소설가가 등장하는 이야기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아내의 인도인 친구 이야기 (모두에게 복된 새해 - 레이먼드 카버 에게), 일본에서 온 사촌 동생이 등장하는 이야기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등 이방인들, 외부에서 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되고, 그게 어떤 공통된 주제를 만들고 있다고도 생각되는데요. 김연수 : 그렇죠. 저도 모아놓고 보니 그렇게 된 것인데, 작품집에 수록된 소설들을 쓰는 동안 외국에 체류하는 기간이 많았어요. 외국인으로 다른 나라에 체류하다보니 말을, 소통의 문제를 계속해서 생각하게 된 거였죠. 어떤 사건을 바라볼 때도 외국인의 관점에서 보게 되고... 사실 저도 이렇게 균일한 내용이 나올 줄은 몰랐어요. 알라딘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같은 경우에는, 이전작품과는 달리 알레고리를 사용한 작품이었는데, 그 작품은 빠져있습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 같은 경우는 표지도 그렇고, 배열도 그렇고 일종의 ‘팝 앨범’ 같은 느낌이 나는데요.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일부러 빼신 건가요? 김연수 :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계약 문제가 있어서 빠지게 된 거지요. 그렇지만, 이번 작품집은 의도가 하나도 없는 게 맞아요. 그런데 상통하는 것들은 있죠. 굳이 ‘팝’적인 느낌이라고 하면, 어떤 밴드가 앨범을 계속 내오다가, 4집 앨범쯤 된 느낌? 특별히 튀는 곡은 없지만 여러 곡들이 균일하게 어우러져 있고, 전반적으로 괜찮고... (웃음), 레드 제플린의 4집 앨범 같은 느낌? (웃음) 알라딘 :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는 원래부터 좋아하시던 건가요? 김연수 : 메리 올리버의 작품들은 원래 좋아했어요. 그 사람 시는 정말 좋아요. 모 출판사에서 미국의 좋은 시들을 모아 선집 형태로 출간하는 논의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때 살펴본 것들이죠. 미국의 좋은 시들을 찾아보자는 심산으로 찾다보니 이 사람 시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한결같이 좋았어요. 이 사람이 산문집도 썼는데,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정말 좋아요. 저는 시라는 것에, ‘힐링 포엠’이라고 하지요, 치료의 개념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어요. 그런데 메리 올리버의 시를 읽다보면, 말을 건다고나 할까요, 시로 치유도 가능하겠구나는 생각이 들어요. 사진작가 낸 골딘도 제가 아주 좋아하는데, 독일에서 이 사람 사진집을 보다보니 또 메리 올리버의 시가 나와요. 낸 골딘과 메리 올리버, 세계는 이렇게 연결돼 있는 것이죠. 낸 골딘의 유명한 작품들, 이를테면 ‘필리핀이 죽던 날의 노을’ ‘사랑이 끝난 뒤의 침대’ 같은 것들도 저를 치유한 사진들이에요. 그중에서도 노을 사진, 저는 이 사람의 노을 사진을 정말 좋아하는데, 사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마지막 장면도 이 노을 사진을 생각하며 쓴 것이에요. 저도 그런 사진을 찍고 싶어서 수차례 시도했지만, 그런 색감은 잘 안 나오더라고요. 그런 빨간 구름 같은 건. 알라딘 :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일본 밴드 이름(World's End Girlfriend)에서 따온 것이라 하셨죠? 김연수 : 네, 어감이 일단 좋았어요. 이 밴드 노래 중에 ‘탄생일 저항일’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지금 쓰고 있는 <원더보이>란 장편에도 영향을 준 노래죠. 아무튼 이들의 노래하고, 그... 포르투갈 작곡가 호드리구 레아옹, 이런 사람들을 좋아해요. 레아옹의 노래를 즐겨 듣다가 또 World's End Girlfriend를 알게 돼 일본에서 나온 그들의 앨범을 모두 구입했고, 결국에는 포스트-록에 빠지게 된 것이죠. 포스트-록 앨범은 국내에서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예전 ‘푸른새벽’이란 밴드에서 활동하던 정상훈씨라고 있는데, 제가 포스트-록을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그런 계통의 음악들을 많이 구해줬어요. 좋아하니까 밴드 이름을 책 제목으로도 쓴 것인데, 워낙 어감이 좋아요. ‘세계의 끝 여자친구’라는 제목이 주는 이미지에, 전부터 쓰고 싶었던 메타세쿼이아 나무 이야기를 더하고 거기에 저의 상상을 넣은 것이죠. 메타세쿼이아 나무 이야기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 걸 듣고 막 찾기 시작하는 거죠. 그 이면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연들을. 이건 우리나라 기사나 자료로는 찾을 수가 없어서 중국이나 미국 사이트를 막 뒤진 거예요. 그러다보니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걸 찾은 거죠. 그런 일들이 (세상에)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돌이켜보다보면, 그런 일들이 실제로 있었더라고요.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를 쓸 때는 혹시 택시에 카메라를 달아놓고 하루 종일 중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해서 찾아보니, 그런 사람이 실제로 있어요. 그런 택시기사가 세상에 실제로 있는 거예요. 표지 사진도 마찬가지예요. 저 표지 사진은 제가 직접 찾아서 (출판사에) 이야기한 것은 아니고 출판사에서 후보 사진 몇 장을 주었어요. 그런데 저 사진이 뭔가, 제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그 사진이었던 거예요. ‘요아나 린다’라고 스물아홉 살 먹은 포르투갈 여성 사진작가인데, 지금은 이분을 참 좋아하게 되었어요. 제가 포르투갈을 참 좋아하는데, 그 포르투갈 사람인 걸 알고 얼마나 좋아했겠어요. 또 그 사람 작품을 보니 메리 올리버나 낸 골딘과 연결되는 세계에 있는 것도 같고... 사진의 모델은 요아나 린다 본인이에요. 아무튼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죠. ‘놀라움’, ‘경이’ 같은 것들. 우연에 우연을 거쳐 필연처럼 보이는 일들이 세상에 있는 거예요. 어떤 ‘미신’ 같은 것일지도 모르죠. 알라딘 :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이름이 ‘김희선’이었습니다. 별다른 의도가 있으셨는지... 김연수 :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된 거겠죠? 할머니가 먼저 등장했어요. 그런데 그 할머니가, 아무리 봐도, 김희선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할머니인 거예요. 할머니가 먼저 있고 이름이 있는 것이지, 이름이 있고 나서 캐릭터가 생긴 건 아니에요. 알라딘 : 알라디너 Arch 님은 지금 <밤의 노래한다>를 읽고 계신데, 이정희나 여옥처럼 날 것 그대로 생생하고 멋지고 건강한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는데요. 혹시 작가님의 여성관...이나 여성 화자를 떠올릴 때 염두에 두고 계신 게 있는지 물어보셨습니다. 김연수 : 여성관... (웃음) 제 소설의 남자들은 여성 화자에 의해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인물들이에요. 어떤 여성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일을,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여성 화자가 좀 멋지고 세요. 한 남자가 사건에 휘말리게 해야 하고, 한 남자의 인생을 바꿔야 하니까. (웃음) 장편 같은 경우는 훨씬 더 큰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 센 캐릭터가 나오게 되는 것이고요. 소설적 필요에 의해 이런 인물들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주변에 보여주면 여자분 들은 이런 게 어디 있냐, 이렇게 멋질 수가 있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 등장하는 여고생 캐릭터는, 말 그대로 연구처럼 작정하고 쓴 것이죠. ‘소녀’에 대해 쓰고 싶었거든요. 근데 이 역시, 주변 여성분들은 동의하시지 않더라고요. 여고생이 이렇게 멋질 리가 없다고. (웃음) 알라딘 : 또다른 알라디너 whale 님이 주신 질문 중에 <사랑이라니 선영아>를 비롯해 사랑이야기에 능란하다고 말씀하신 게 있습니다. 이게 연애경험 때문인지도 물으셨는데요. 김연수 : 사랑. 저는 뭐랄까요, 선배 소설가들과 다른 위치에 있는 소설가지요. 국민문학을 못 쓰는 세대의 소설가라고 할까요. 우리 세대는 개인사가 역사적 사건보다 더 크게 다가오는 세대니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한국전쟁보다 실연이 더 큰 재앙인 것이죠. 한국전쟁이나 5.18 같은 사건들에 대해 알게 되더라도 이전 세대, 직접 경험했던 세대처럼 인생이 크게 바뀌는 건 아니지요. 개인적으로 괴로웠던 순간들에 대한 반응이 더 큰 거죠. 그런 차원에서 사랑 문제가 중요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이해받을 수도 없는 일들이 이제 우리에겐 더없이 중요해졌어요. 소통의 관점에서 이들은 쉽게 서로를 위로하지 못해요. 용산 사건이라든가 하는 사회적 재난에 대해 소통이 힘들어요.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분노하지만, 사회적으로 행동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지요. 이건 당위의 문제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반면에 연애라는 것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고, 위로가 가능한 거죠. 뭐랄까,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딜레마가 있긴 한데요... 하지만 나이가 들다보니 개인적 고통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보편적 고통으로 연결될 수 있겠다는 확신 같은 게 들기 시작했어요. 알라딘 : 이를테면 용산 사건 같은 것을요. 김연수 :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와 같은 경우도 용산, 그 일을 어떻게 소설로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나온 소설인데요, 결과적으로 실패작이랄까. 고민이 있었지요. 투박하나마 내가 알게 된 진실을 말하는 게 중요한가, 소설적으로 완성도를 높여서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게 만드는 게 중요한가, 하는 문제를요. 그런데 이 일을 기록소설처럼 직접적으로 쓰고 사회적으로 동의를 얻는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과연 이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하는가, 쓴다면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건 저의 오랜 고질이자, 제 소설쓰기의 기원에 해당하는 문제에요. 혹은 차선. 그것에 대한 차선으로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되 잘 읽히는 소설을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방법도 있지요. 최초의 제 의도는 마지막에 나오는 ‘윤현구’군의 편지를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전문을 그대로 옮겨놓았었지요. ‘달로 간 코미디언’ 같은 경우도 김득구 선수의 권투 실황을 그대로 이야기로 옮겨서 그를 영원히 기억하겠다는 생각에서 쓰기 시작한 소설인데 역시 실패작이 됐어요. 그래서 저는 번번이 후자의 방식을 택하게 되었고, 결국 제게는 이 방식이 맞는 것 같습니다. 처음의 의도와는 다르게 되었지만요.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같은 경우도, 정수일이라는 분의 삶에 대해 써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가 실패한 경우죠. 하지만 너무 매력적인 삶을 사신 분이라 재도전했는데 역시 실패하고 대신에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는 게 나왔죠. 알라딘 : 다시 Arch 님의 질문입니다. Arch 님은 <청춘의 문장들>이나 <여행할 권리>를 좋게 읽으셨다고 하는데요. 두 편의 장편 소설을 구상 중이란 얘기를 다큐멘터리 [할매꽃] 시사회에서 들었다고 하시면서, 다른 장르의 책을 출간할 계획이 없냐고 하셨어요. 김연수 : 저는 긴 에세이를 쓰고 싶어요. 수전 손택 같은 글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수전 손택, 낸 골딘, 메리 올리버... 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들이죠. (웃음) 알라딘 : 그런데 <청춘의 문장들>에 보면 에세이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김연수 : 아, 그건 저 개인에 대한 글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었어요. 지금은 겨를이 없지만, 나중에라도 긴 에세이를 쓰고 싶다는 거지요. 물론 ‘나’와는 관련되지 않은 것들입니다. 이건 개인적으로 창피했던 것도 있고... 정말 <청춘의 문장들> 나왔을 때는 너무 창피해서 주변에 책을 돌리지도 않았어요. 지금은 그런 시기를 지나서 참 다행인데, 처음 소설을 쓸 때는 자꾸 자기 얘기를 하게 되요. 쓸 게 없으니까.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밑바닥까지 긁어내서 쓰다보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자괴감이 드는 거죠. 그럴 땐 정말 힘들었어요. 소설과 개인사를 착각하는 분들이 계시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어떤 부분은 일리가 있지만, 개인사를 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알라딘 : GoldSoul 님께서, 김연수 님 미투데이에서 별 다섯 개 추천을 받은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을 행복한 기분으로 읽었다고 하셨습니다. 가을에 어울리는 별 다섯 개 짜리 책을 몇 권 더 추천해주실 수 있냐고 물으셨는데요. 김연수 : 별 다섯 개짜리 작가들이 있죠. 한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고 그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건 정신없는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지금 킹스 오브 컨비니언스(Kings of Convenience)의 다음 앨범을 기다리는 일 덕분에 하루하루가 천천히 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말이죠. 줌파 라히리 같은 경우는 <축복받은 집> 보다 <그저 좋은 사람>이 좋았고, 그러다보니 그 다음은 더 기대가 되는 것이죠. 제가 말하는 별 다섯 개는 사심이 잔뜩 들어간 별 다섯 개라고 할 수 있어요. 하루키 같은 경우도, 뭔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것이 되었지만 (웃음), 좋아요. 지금은 읽으면서 욕도 하고, 감탄하기도 하고. (웃음) 얽히고 설킨 추억들도 있고요. 이 사람, 나이가 몇인데 이런 것들을 욕망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인생에 이런 별 다섯 개짜리 작가들이 많고 그들의 신작을 기다릴 수 있다면, 참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기다리는 건, 폴 오스터의 소설이에요. 내년쯤에는 번역되어서 나올 거라고 알고 있어요. 알라딘 : 별 다섯 개짜리 작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얼마 전에 레이먼드 카버에 대한 소동이 있었죠. 편집자의 영향이 컸던 글이다, 실제 원고는 출판된 것과 많이 다르다, 편집자의 역량이 많이 포함된 평가였다, 하는 소문들 말이에요. 김연수 : 네, 저도 그 소문을 들었지만 사실대로 다 믿지는 않아요. 거기엔 상업적인 맥락이 있다고 봐요. 생존해 있는 부인이라든가... 하지만 사실이라 해도, 판본이 두 개가 된다는 건 좋은 일이죠. 편집자의 영향이 많았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쪽 (미국) 출판계는 원래 편집자의 영역이 크고, 능력 좋은 편집자도 많지요. 일종의 부틀렛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요즘 비틀즈가 한정판으로 나와서 다시 팔리는 것처럼. 알라딘 : 하루키 이야기가 나와서요. 이번 소설집 제목 때문에 오해가 있진 않았나요? 김연수 : ‘세계의 끝’이라는 건 저도 많이 썼어요. (웃음) 원래 좋아했던 개념이기도 하고요. ‘세계의 끝’이라는 말이 가진 느낌이 좋아요. 끝까지 간다는 것. 어떤 사람들은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같은 제목의 일본영화 얘기도 하지만, 그 영화는 못 봤어요. 그 영화의 제목도 아마 일본 밴드 이름에서 나왔거나 아니면 그 영화를 보고 일본 밴드를 만들었거나 아무튼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겠죠. 알라딘 :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 남자의 이름은 ‘케이케이’를 먼저 정하신 거죠? 본명 ‘기준 킴’은 그 뒤에 따라온 것이고. 김연수 : 네, 한참 좋아하던 ‘여행스케치’의 노래 중에 ‘난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어’라는 노래도 있고 해서... 제목을 바꿔보기도 했어요. ‘거무스름한 불’로. 자꾸 그 노래 제목이 생각나서. (웃음) ‘케이케이’는 그냥 정한 거였어요. 정하고 나서 보니 편집 쪽에서 좀더 둥글둥글한 이름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주기도 했는데, 역시 이전 느낌이 더 좋다는 결론이 났죠. 알라딘 :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출연하신 계기를 여쭤봐도 될까요? 김연수 : (웃음) 그럼요. 십년 전에 제가 한예종에서 강의한 적이 있어요. 홍상수 감독은 극작과인가 영화과인가 학과장이셨는데, 그때 한번 뵌 적이 있죠. 그런데 그분이 저를 기억하신 건 아니고, 저는 그 분을 알지만 그 분은 저를 모르는 상태였어요. 영화에 소설가 한 명이 출연하면 좋겠다. 해서 주변에서 사진 몇 장을 구해다가 그중에 한 명을 찍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엔 거절했다가, 다시 전화를 걸어서 해보겠다고 했어요. 제가 홍상수 감독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저예산으로 촬영되는 영화이기도 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저는 저예산이라고 해서 무슨, 동네 주민들 출연하고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가보니까 엄격한 오디션을... (웃음) 흥행감독이라는 배역은 알고 있었어요. 흥행감독인데, 김태우가 이 사람을 부러워한다, 뭐, 그 정도. 그런데 홍감독님이 그날 대본을 써서 그날 주는 스타일이다보니 어떤 연기를 해야하는지는 몰랐죠. 흥행감독이라는 것만 알고 다른 건 다 모르는 상태. 나중에 알고 보니 감독님은 뭔가 성공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표정 같은 걸 기대하셨던 것 같은데 제가 그런 게 될 리가 없으니까. (웃음) 엄지원씨 부분은 나중에 봤어요. 시사회가 있다고 해서 지하철 타고 시사회장으로 가고 있는데, <씨네21>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더라고요. 첫 질문이 그래요. “이번에 홍상수 감독 영화에 강간범으로 출연하신다면서요?” 그래서 제가 깜짝 놀라 지하철 사람들 다 듣는 데서 “네?! 제가 강간범이라고요?!” 했죠. 그렇게 시사회에 가서 무대인사까지 했어요. “영화 출연은 가문의 영광”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도 떴더라구요. 홍상수 감독 영화의 남자 배역이니까 망가진다는 건 알았고 그게 또 매력적이었는데, 강간범이라니.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말아야겠다, 하고 있어요. (웃음) 그 다음에 영화출연 제의를 두 번이나 받았어요. 하지만 다 고사했어요. 본격적으로 뭘 하는 건 별로에요. 저는 보상이 안 되는 일들이 좋아요. 보상은 안 되지만 재미있는 일들이. 알라딘 : 지금 집필 중이신 소설에 대해 들려주세요. 김연수 : <창작과 비평>에 연재중인 소설이 있고요. 임진왜란을 겪는 두 형제 이야기인데, 뭐 그런 이야기예요. 알라딘 : 일전에 인터뷰 하실 때 스페인 선교사 이야기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김연수 : 네, 그게 그 이야기지요. 두 형제가 일본에 가서 한 명은 가톨릭 신부가 되어서 신을 섬기고, 다른 하나는 상인이 되어 신을 거부하는 그런... 근데 이 분들이 얼른 일본에 가야하는데, 아직 임진왜란도 시작이 안 되었어요. 갈 길이 멀죠. (웃음) 알라딘 : 다른 하나는 1984년을 배경으로 한 열다섯 살 주인공의 이야기인 <원더보이>죠? 김연수 : 네, 이것 때문에 또 하루키 이야기가 나올 것도 같은데(웃음). 1984년은 정말 엄청난 해였죠. 멋진 팝음악이 정말 많이 나왔어요. 일 년 내내 불후의 명곡들이 쏟아져나왔어요. 1월 1일 백남준 선생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나온 탐슨 트윈즈의 ‘닥터 닥터’부터 시작해서 마돈나나 신디 로퍼도 그렇고. 일 년 내내 좋은 노래들이 쏟아져나온 해로 저는 기억해요. 알라딘 : 소설가 김중혁님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다작하는 작가라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연수 : 다작, 근데 제가 다작이면 김중혁씨는 지나친 과작... (웃음) 저는 당분간 가을마다 신작을 내고 싶어요. 지금 쓰는 게 2년 뒤에 책으로 나오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한 건 아닌 상태입니다. 부담은 없어요. 지금은 연재를 하고 있지만, 이번 연재가 끝나면 연재 없이 지금 같은 식으로 2년 정도 터울 두고, 그렇게 가려고 해요. 이렇게 글 쓰는 게 저한테는 맞더라구요. 미리 써둔 것을 2년 정도 시간을 들여 고치거나 다시 살펴서 책으로 묶어 내는 시스템이요. 알라딘 : Sati 님의 명료한 질문입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말씀해주세요. 김연수 : 좋아하는 것. 저는 신보, 아까 말했듯이 신작, 새 책, 이런 것들이 좋아요. 또, 하늘 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싫어하는 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얘기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는 얘기에 제가 반응을 보이게 되는 게 싫지요. 모르는 사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의 말에 반응을 보이게 되는 상황 같은 거요. 반대로 저도 그런 말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요. 또, 서울. 물론 서울은 멋진 도시였지만 점점 안 좋아지는 것 같아요. 뉴타운도 그렇고, 요 근방에 ‘피맛골’도 사라지는 중이고. 내가 알던 서울에서 모르는 서울로 바뀌는 과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요. 서울은 교통체증으로 사람들의 인생을 허비하게 만드는 괴물 같은 도시로 바뀌어가고 있어요. 알라딘 : 요즘 주목하시는 후배 작가가 있다면요? 김연수 : 주목한다기보다는 친한 후배들이 있죠. (웃음) 굳이 꼽자면 저는 김애란씨가 글을 참 잘 쓴다고 생각해요. 그건 글 쓰는 실력도 있지만, 소설가적인 태도가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것들에 반응하게 되거든요. 자신을 공격하는 경향도 있고, 의미 없이 나온 말들에 대해 상처를 받기도 해요. 김애란씨는 그런 면에서 강한 것 같아요. 알라딘 : 마지막으로 김연수님을 사랑하시는 분들, 알라디너 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연수 : 이것저것 편애하는 짓을 자주 하다보니까 요즘 들어서는 시간마저도 편애하더라구요. 감이 옵니다. 지금은 좋은 시절이다, 라는 느낌. 그런 느낌이 들 때는 아낌없이 그 시간을 즐겨요. 그 다음에는 분명히 괴로운 시간이 찾아오죠. 그때는 인간답게 살짝 괴로워해주시고. 그러고 나면 확실히 또 좋은 시절이라는 느낌이 찾아오죠. 그땐 다시 또 아낌없이. 남김없이. 모두모두 다른 날들이니, 자기 삶을 세세하게 구체적으로 편애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을 즐기는 일에는 감정을 아끼지 마세요. 사치스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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