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이 얇으면 옷이든 마음이든 잘 비친다. 겉이 두꺼우면 속이 잘 안 보인다. 겉이 두꺼운 사람은 속을 잘 알 수 없다. 반대도 있다. 그런 사람은 속을 투명에 가까워지도록 해야 한다. 잘 비치면 자꾸 속 없어져야 한다. 나도 그래야 한다. 내내 어려운 것. 입과 입술 사이. 한 점 한 점 감각. 입술에 머무르기. 속으로 쓰는 것. 빨강과 하양 사이. 빨강이 하양이 되기까지.
―에세이 「빨강과 입술, 어긋나면 연주」 중에서
내가 노래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닌 용접의 방식으로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언어에 함부로 피와 살을 이식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언어에나 어울릴 법한 풍경을 덧입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함부로 헐렁한 내부를 들인 언어를 가져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언어가 강렬해지고 과격해질 때 그것은 언어의 내부와는 상관없는 것임을, 언어의 외피만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언어의 내부를 바꾸고 싶다. 세계는, 대상은 표현하는 만큼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테이블'을 '표현의 열정'으로 심장이 뛰는 '새'로 만든 퐁주처럼, 격렬한 외부가 아니라 격렬한 내부를 가진 언어를 만들고 싶어 한다.
가장 작은 것, 최소를 발견하기까지는 최대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고 나면 최소를 발견하는 시선이 생긴다. 최소의 발견만 하겠다는 자발적 능동성이 생긴다. 이 동선을 겪으면 필요라는 실용적 단어를 동화적 단어로 바꾸는 힘이 생긴다. 최소로 최대를 지탱시키는 마법을 갖게 된다. 최소라는 점이 들어 있어야 최대라는 풍경에 멈추게 된다는, 최대 속에는 이미 최소가 들어 있다는 비밀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므로 최소는 처음 선택이자 마지막 선택이다. 모든 것을 다 버려도 포기 못하는 그 무엇, 그러니까 뛰는 심장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