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은 갯물, 아라는 바다라는 뜻이며 조금씩 모여 큰 곳을 향해 달려가자 하며 여울아라 동인지를 발간하고 이제 그 17번째 「꿈엔들엔」을 펴내니 함께하는 회원 모두들에게 고마울 뿐이다.
시를 쓰는 목적이나 과정은 여러갈래이다. 그 중 우리는 유명해진다 또는 멋드러지다 등등 남에게 보이려는 겉치장 그런 것 보다는 지금에 살고 있는 우리의 울림을 토해내자 그리고 남겨진 삶을 보다 정갈히 살아보자 외치고 있는 것이다
눈을 감는 그 날까지 꿈을 꾸고 희망을 갖고 삶을 성장 시킨다면 잔잔하게 고이는 깊은 산속 옹달샘 같이 늘 차오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래서
꿈엔들엔 잊으리 그 잔잔한 소망과
희망과 바람을 불러 품어보세나
하여 이번 호는 「꿈엔들엔」이라고 하였다
2022년 3월 15일
리더 김중열쓰다.
어느덧 팔순에 다가선다. 삶을 여과없이 받아들인 지난 세월이 덧없다고 할까? 하며 피식 웃어버리는 요즘이다.
흔히들 이 나이가 되면 삶을 정리하고자 할 게다. 그러나 나는 너무 억을하기에 다시 꽃을 피우겠다고 세월 향해 앙탈하는 중이다. 나만 그러할까? 아닐 게다. 꽤나 많은 이들이 즐기려고 하건만 표현을 아니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겉으로는 그냥 저냥 세월따라 흐르다 가겠다고 할 지는 몰라도 속마음은 다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드니 나를 향해 냉소가 땀구멈을 파고들며 몸서리치는 요즘이다.
누구나 꿈은 갖고 있을 게다. 그러한 꿈을 사치라고 하며 꽃을 꺾어내듯 싸늘한 몸가짐을 갖을 수도 있겠다 싶다. 삶이란 꽃은 끝없이 피어나겠지만 체념이란 칼로 싹득싹둑 베어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체념을 버린다면 꽃은 꿈을 꾸며 화려하게 피어나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꿈을 팔아보겠다 하는 욕심 한 줌 걸머쥐고 이 책을 쓰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희야147로 그녀를 떠나 보낸다. 존재하지 아니했던 여인! 누구인지도 모를 희야이기에 이제 허물을 벗으며 보다 더 성장하기 위한 선택일 뿐이다.
2024. 7. 15.
2018년 10월 어느 비오는 날 무작정 우산도 없이 전철을 탔다. 동해로 가려다가 차비도 아낄 겸 4호선 전철을 타고 오이도를 향하며 나는 틈틈히 폐북에 어느 역 어느 역 하면서 글을 올리며 빨간 등대로 향한 것이다.
오이도 축대에 도착하니 비는 소슬하게 내린다. 30대로 보이는 젊은 한 여인이 아까부터 내 주위에 맴을 돈다. 그녀에게 말을 건네는 용감한 나를 발견한다. 그 당시 나는 폐북에 라이브를 즐겼기에 그녀와 대화를 잠시 방송을 하였다.
축대를 함께 거닐다가 노천명의 시비 사슴을 읽어 내리며 모가지가 길어진 사연을 이야기하니 그녀는 또박또박 대화를 함께 즐긴다. 아마 시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미련없이 헤어졌다.
그해 11월 11일 이 책의 그림을 그려준 무아 조남현을 만나게 된다. 몇몇이 피맛골의 낮은 천장 아래서 막걸리를 마시는데 조화백은 엄청 즐기며 자신의 예술관을 펼친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우나 고우나 끈질긴 만남을 이어간다.
그녀는 나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설파한다. 아내에게 애정결핍증을 앓고 있다는 말을 수없이 듣게 된 까닭을 깨우쳐 주는 그녀이다,
묘한 일이 일어난다. 1집에 젊은 여인의 죽음을 실었다.
집에도 또한 젊은 여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두 여인 모두 30대 여인이다. 한번도 만나지는 못했지만 톡으로 통화로 6개월 남짓 마음을 털어 놓고 그녀들은 떠났다.
이 책의 내용은 툭정한 어떤 여인애 대하여 쓴 것은 아니다. 그냥 내 안에 숨겨진 여인을 끄집어 내었을 뿐이다. 두 젊은 여인 또는 지금에 내 주위의 여인도 아니다.
그냥 내안에서 웅크리고 조잘리던 어린 나이로 멈춘 여인 피터걸과 독백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리스 신화에 “뮤즈” 라는 숲속의 요정들이 등장한다. 神 아폴론 에게 껍질을 벗기우는 반인반수의 마르시아즈의 비명소리 그마저 즐기고 있는 무리들이다.
나 또한 또 다른 내 안의 뮤즈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떠오른다. 희로애락에 상관없이 나의 남겨진 삶의 풍요를 누리려 애를 쓰는 모습은 뮤즈와 다를 바 없다고 해야할까 그냥 웃어버린다. 아마 많은 이들 또한 그리 생각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빈곤한 물질 셩활에도 풍요의 思惟를 누리고 황폐한 삶의 여정 그 많은 환경의 量을 바라보며 그중에 선택된 일부를 아름다운 質이라고 착각하는 꿈을 누려 스스로 위로하며 끝없이 성장하는 모습을 그려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그리 모여진 여울아라15 동인들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수명을 140세까지 바라본다고 하지만 살아 있어도 죽음보다 못하다면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우리는 詩를 읽고 토하고 성장을 하자고 이야기를 하며 마음의 치유를 거듭하자고 나는 늘 권유하며 함께 하련다며 반발자욱 앞서 나가보자 시나브로 노력을 하고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말은 옳다. 여기에서 멈추면 흐르는 냇물에 돌 하나에 걸려 맴도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고 나는 외치고 싶다.
강물에 허우적이는 낙엽 한 장이 내 모습이 아닐까 오래 전에 아니 젊은 어느 날부터 마음에 담아오며 인생무상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떠들던 지난날이 있었다.
김삿갓이 방랑을 하며 시를 읊거나 강태공이 곧은 낚시로 낚시를 하는 또는 릴케가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부르짖는 그러한 모습 자체가 냇물에 걸려 멈추다 고뇌하는 모습이 아니련가 되짚는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사유를 할 능력이 뛰어났다는 점이 아닐까 하며 나는 절대자에게 의지하기 이전에 내 스스로를 구하기로 하기 시작하며 성장이란 들숨날숨이 있어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다.
또한 “저 밖”의 드러난 모습에만 치우치지 아니하고 “이 안”에 성장에 관심을 갖어 보자 나는 권하고 있다. 겉만 화려하고 속에서 역한 내음만 가득하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려 보면 어떨까 나는 묻고 싶다.
흔히들 절대권력에 줄서기를 잘해야 살기가 편하다고 그리들 말하련만 나는 시의 중심부로 다가서며 그리도 맴돌던 삶이 돌에서 스스로 헤어나 강으로 바다로 달려가더라.
그대들 스스로가 우주의 중심인 존재라는 깨달음이 일어설 때 “사유의 뜨락”에서 쾌적한 삶을 누리기 바랄 뿐이며, 끝으로 정랑 윤효순의 편집 협조에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2023년 3월 15일
한톨 김중열 쓰다
설국이란 눈이 소복소복 쌓여진 꿈의 나라를 연상하게 될 게다. 어제의 희로애락 모두어 덮고 철없던 어린 날로 돌아 가는 그런 꿈을 꾸며 나는 살아가련다 하며 詩의 세계로 문을 두드리며 또다른 내가 외치고 있는 모습, 즉 "꿈을 티내다" 라는 의미로 "꿈티" 라고 색다르게 표현을 해본다.
詩를 처음 시작할 때는 거방지게 포장하려고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알갱이 없는 작품들고 거들먹이기도 하던 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왜? 시를 쓰지" 하며 한동안 회의를 품기도 하였고 펜을 놓으려 했던 기억이 남는다.
2022년 1월 4일 싸인펜으로 긁적이며 채 표현못한 詩語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 이후 내 안에 있는 울림을 색으로 線으로 吐하며 詩의 행로에 대한 변곡점을 맞이하면서 스스로를 낮추이려 노력을 하니 물밀듯이 채워져가는 알갱이들의 속삭이는 密語로 새로운 세계를 접하게 되었다.
시인으로 한톨, 화가로 톨카소라는 이름으로 시나브로 나의 삶을 즐기며 神이 나에게 지난날 업보로 벌을 준다며 150세까지 살아야 한다고 떠들어 대건만, 속마음은 내일 단 하루를 산다하여도 뜻깊은 삶을 살겠다 하며 저 높은 곳을 한걸음 한걸음 向하겠다 노력을 할 뿐이다.
2024년 12월 15일
한톨 김중열 쓰다
낙서로 시작한 시창작 활동이 어언 10년이 넘어간다.
흔히들 나에게 “막걸리 시인”이라고도 불러주지만
요즘은 즐기는 편이다.
왜? 그렇게 막걸리를 즐기게 되었는가는 시의 중심부로 향한 나의 걸음에서 그 답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10권의 시집중에서
5집 별이 된 희야
6집 돌아온 희야
8집 바람꽃 희야
에 이어 “설국의 희야”를 보이게 되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접혀져 숨긴 희야를 펼치지 못했기에 막걸리를 마시며 허공을 헤메이며 살아왔던 나는 이제야 희야가 보여준 더 높은 차원의 새로운 세상을 바리보게 되었고 또한 보너스로 우주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또 다른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이다.
사는 게 무엇인지 깨닫게 되니 곤혹스런 어제를 토하기를 그 빈 공터에 빈곤한 언어 대신, 2022년 1월 4일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이젠 나의 시집에 또한 나의 그림으로
채워가는 즐거움에 풍요한 시의 고개에서 뒹구르기를 마치 삼천갑자 동방석인양 마냥 젊어지는 마음 뿐이다.
그동안 표지와 삽화를 수고해준 시그널 아트 창시자 조남현 화가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고자 한다.
2023년 2월 15일
한톨 김중열 쓰다
어느덧 18번째 동인지이다. 더구나 25인이 함께할 정도로 성장을 한 세월이다. 여울아라에서 시를 처음 써보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삶을 함께 토하고자 한다.
우리는 나이를 떠나서 인간의 존엄성을 캐어내며 끝없는 성장을 하려고 노력을 하며 시를 음미하고 쓰고하는 모임으로 시작을 하였다. 따라서 시를 이렇게 저렇게 써야 한다 권하지도 권고 받지도 아니한다. 소통의 울림을 보다 크게 주려고 노력을 하련다.
따라서 흔한 등단 같은 껍데기는 내던지고 있다. 능력껏 삶을 토하여 비우고 채우며 성장하자 서로가 토닥이는 작은 모임으로 기성 문학단체와는 성격 자체 다르기에 인간의 존엄성을 찾기 위해 사유思惟를하며 “포스트 모더니즘”의 방금을 종합예술로 추구하고자 하는 유별난 모임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시기는 100여넌전 1920년대경에 서구의 모더니즘에서 볼 수가 있다. 절대자에 의지 아니 하고 봉건적 틀에 벗어나자 함이다. 허나 관성의 법칙에 메여 어제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퇴화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시를 잘 쓴다 그림을 잘 그린다를 떠나 평가를 받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냥 슴겨진 또는 접혀진 자신의 재능을 펼쳐내어 주어진 삶을 싫커정 태우고 태우며 삶의 쾌락을 누려 보자 하며 어제에 옭메이지 아니하고 오늘에 최선을 다하여 내일의 행복을 거머쥐고자 한다.
스스로 추구하는 능동적 자세와 밝은 빛을 품는 긍정으로 인간의 존엄성尊嚴性을 낚으려 한배를 타고 2015년 이후로 서로가 배려하며 기운차게 노를 저으며 세월이란 바다에서 강태공의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시를 즐기고 예술을 품고 살고지고 하자 흘러가고 있는 우리들이다.
2022년 10월 15일
리더 한톨이 쓰다.
친구가 필요하다.
속을 털어놓을 그런 친구가 절실하게 필요한 요즘이다.
그러나 내 안에서 하나 둘 사라져만 간다.
영원한 친구 = 씨밀레 이라고 언듯 생각이 떠오른다.
살아간다는 그 명제에 의미를 두고 싶다.
참이다 거짓이다 하는
그런 것을 떠난 의미를 그리고 싶을 뿐이다.
얼마전에 또한 한 여인이 50도 못넘기고
아해 셋을 두고 떠났다.
나의 "씨밀레"는 누구일까? 그마저 의미가 없다.
그저 흐르는 세월,
그 안에 존재하는 공간에도 또한 "씨밀레"는 존재할까?
이런저런 상념 속에
때로는 그마저 의미를 상실해 간다.
허나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을 해야 할 게다.
영원이라는 시간속에 나는 한 點일 뿐이다.
나는 고로 영원할 게다.
點과 點을 이 우주 속에 시간을 좇아
영원히 존재하는 씨밀레로....
먼저 시도를 해 본다.
35세의 나요한* 군에게 4편의 시를
젊은 느낌으로 영어로 번역을 부탁했다
2023년 시월의 멋진 날에
나는 최근 몇 달 사이 매우 큰 어려움을 당했다. 아내가 큰 아들에게 사기를 당해 살던 집을 내놓고 전세로 온지 얼마되지 않아 또 월셋방으로 가야했다. 그런데 아내는 나에게 있던 돈도 작은 아들에게 있던 돈도 떼를 써서 큰아들에게 몽땅 털리고 이사 갈 돈도 없건만 집주인은 짐을 몽땅 빼야 대출받고 남겨진 돈을 주겠다 한다.
이미 아내는 내 주위 사람들에게도 나에게 말도 아니하고 여기저기 돈을 몽땅 빌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방법이 있다 하더니 나는 은총의 지혜를 빌려 돈도 없이 부랴부랴 이사를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사온 낡은 빌라가 더욱 나에게 편하게 대해 주는 것이다. 42평 아파트 보다 더 넓은 60평 정도의 그련 여유로움과 평안함으로 나를 안아주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키클로프섬에 외눈박이 거인은 오디세우스의 병사를 동굴에 가두어 놓고 한사람씩 잡아 먹는다. 오디세우스는 신관인 마론에게서 얻어낸 포도주를 거인에게 주며 인육人肉에 잘 어울릴 거라며 권하니 거인은 포도주를 잘도 마시며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묻는다. 오디세우스는
“내 이름은 우티스요”
우티스는 그리스어로 「아무도 아니다」라는 의미였다.
“이름이 아무도 아니다라고?” 하며 거인은 술에 취하여 바닥에 쓰러지고 오디세우스의 병사들은 거인의 눈을 찌르니 거인은 고통에 못이겨 비명을 지른다.
그 비명을 듣고 거인 형제들이 놀라서 동굴로 달려온다.
“무슨 일이야?” “아무도 아니다가 내 눈알을 뺐어, 아무도 아니다가” 거인이 소리쳤지만 거인 형제들은 그가 실성했다고 되돌아 갔다.
우리는 스스로 우티스 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두 모자母子를 용서容恕하기로 했다. 용서란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무관심하게 내버려두는 것이라 하는 것이라 한다.
나는 그들을 그들에게 마음 속으로 가족의 연과 사랑을 절단 絶斷하고 그들이 깨닫기를 기다리겠다하는 마음뿐이다. 이미 나에게 큰아들은 망각되어 있고 아내는 신뢰성을 상실한 우티스로 존재할 뿐이다. 물론 세월이 흐른 어느 싯점에서는 어떨지 나도 모른다. 은총의 힘이 결정할 문제일 뿐이다
나는 시詩를 깨닫기를 시작하면서 생生과 사死는 육신의 겉보기 현상이라고 생각할뿐이다. 따라서 재물에 대해서는 그냥 사치 내지는 삶의 악세사리라 여기는 우티스일뿐이다.
감회롭다.
동인지 20번째이니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다
오염 가득찬 마음에 헝클어진 삶이 싫어서
깊은 산속에 옹달샘이 그리워
함께 여기까지 왔나보다
"저" 높은 곳을
"바"라
"보"며
향하여 가고파서
다시금 두 주먹 불끈쥐고
"저 바보" 되어
묵묵히 걷고 있을 뿐이다
2023. 9.
리더 김중열
이제 여든을 바라보며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잠재력을 품고 있다 하지만
제 자신이 이런 경험을 할 줄은
예전엔 정말 몰랐지요.
왜? 그리도 막걸리를 마시며
허튼 소리를 지껄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네요.
내 안에서 성장한 희야도
품을 수 있는 용기도 갖어봅니다.
지금이 바로 또 다른 삶의 시작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되묻기도 합니다.
혹자는 나의 pop song을 듣고는
만능탈렌트라 합니다.
아무렴 어떠하리요만 나는 몽당진 삶의 풍요를
누리며 뜻을 함께 할 여러분들과
삶의 리듬에 따라 마음이 이끄는대로
마음 속 희야와 함께
풍요 속에
몽당진 여생을 보내고자 합니다.
2023. 6.
한톨/톨카소 김중열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