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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서지은

최근작
2025년 1월 <너를 기다리다>

빛의 영역

<확고한 빛의 영역> 일본어 전공자도 아니고, 일본어와 관련해 대단한 경력도 없는 내가 쓰시마 유코의 연작소설 <빛의 영역> 번역을 덜컥 수락한 이유는 한 가지만이 아니다. 하나뿐인 딸을 키우는 싱글맘이라는 소설 속 주인공의 처지가 나와 비슷해 감정이입을 한 것도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소설의 제목 때문이었다. 전남편과 별거를 시작하고 지은 지 20년쯤 된 방 두 칸짜리 복도식 아파트에 아직 어린 딸과 나만 남겨졌을 때 나는 참 엉망이었다. 한동안 거의 매일 밤 술이나 수면제 따위에 의존해 불안과 불면의 밤을 견디고는 했다. 집은 점점 그늘이 잠식하기 시작했다. 청소를 소홀히 해 여기저기 불결했으며, 호더증후군 기질 탓에 집 안 곳곳 온갖 물건들이 산처럼 쌓여갔다. 책, 아이 장난감, 옷가지, 그릇, 술병, 간식 부스러기가 한 덩어리를 이루어 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치우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고, 치울 에너지도 당시의 내게는 없었다. 집은 늘 어둡고 축축했다. 지난했던 소송이 끝나 정식으로 이혼이 확정된 후 나는 딸과 함께 내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일단 결정을 내리고 나니 하루라도 빨리 그 아파트를 떠나고 싶었다. 많은 덩어리를 해체해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렸다. 이삿짐을 트럭에 다 옮기고 남은 잔해들을 치우려 텅 빈 아파트 현관에 들어선 순간의 광경을 잊을 수가 없다. 뭐라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베란다 창문을 통해 무수히 쏟아져 들어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낯선 광경에 일순 사고가 정지되면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때는 단란을 꿈 꾸던 집, 닦고 정리하며 가꾸던 집, 그곳을 어두운 공간으로 만든 장본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였음을. 이렇게나 밝고 따스한 곳이었다는 자각이 슬펐다. 거실 한가운데 모여있던 ‘빛의 영역’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준 광경, 채움으로 단단해지는 시기가 있듯 비움으로 깨달음을 얻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지나친 빛은 눈을 멀게 한다. 짙은 어둠은 시력을 무용하게 만든다. 이혼 후에도 한동안 목적을 상실한 부표처럼 출렁였지만 결국 길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었다. 아이는 빛처럼 밝게 자라주었고,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글은 내게 생계수단은 아니다. 글 쓰는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의 내 꿈 중 하나가 맞지만 글이 내 삶의 유일한 희망이라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글은 확고한 ‘빛의 영역’이다. 쓰시마 유코의 <빛의 영역> 번역은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나를 조금 더 확고한 빛의 영역으로 한 발 더 다가가게 해 준 이 소설을 읽는 이들에게도 그 마음이 부디 전해지길 바라며, 이런 기회를 선사해준 출판사 마르코폴로와 한결같은 응원으로 주춤거리는 내 등을 떠밀어준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인사를 전해본다.

섬세한 체조

평범하게 산다는 건 무슨 뜻일까? 지금은 너무도 유명한 그림책 작가 ‘요시타케 신스케’가 자비로 출판했다는 최초의 스케치 모음집 <섬세한 체조>를 번역하는 동안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특별함을 경험하고 싶고 행복을 위해 애를 쓰지만 실은 평화로운 평범을 내내 누리며 살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어릴 땐 어른이 되고 서른이나 마흔이 되면 사는 일이 점점 쉬워질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 학교에 들어가고, 밥을 먹고, 사람을 만나고, 사회에 진출해 내 손으로 삶을 책임지고, 가족을 일구며 사는 ‘평범한 삶’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님을 점점 선명하게 깨닫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림책 작가가 되기 전의 젊은 ‘요시타케 신스케’도 평범한 삶을 소망하는 샐러리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회에 스며드는 일이 꽤 어렵다는 걸 알아차리게 됩니다. 매일 부서지기 쉬운 마음을 조심스레 껴안고서 어려운 숙제 같은 일상을 견디기 위해 그는 회의 시간에 몰래 작은 종이에 그림을 그립니다. 누구나 보는 것들이지만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사소한 존재들에 관한 그림을 말입니다. 같은 회사 동료의, 어쩌면 지나가는 말로 했을 지 모를 칭찬 한마디로 그 그림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자비출판으로 펴낸 ‘요시타케 신스케’ 작가의 최초의 일러스트 모음집은 어느덧 그를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이 책이 없었다면 ‘요시타케 신스케’는 어쩌면 여전히 샐러리맨으로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 사실이 제게도 커다란 용기를 주었습니다. 꿈은 꾸는 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깨고 난 후에도 꿈을 잊지 않는 자의 몫이기도 합니다. 현실이 아무리 우리로 하여금 꿈에서 깨어나기를 재촉해도 꿈꾸기를 잊지 않는 한 우린 다시 그 꿈을 꿀 수 있고, 그 꿈이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몸이 자라는 속도가 다른 것처럼 마음이 자라는 속도도 저마다 다릅니다. 몸을 단련하기 위해 운동을 하지요? 마음도 그렇습니다. <섬세한 체조>가 ‘요시타케 신스케’에게 그랬듯이요. 2023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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