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머리에
종로5가에서 신촌까지 차를 몰고 간 적이 있다. 목적지가 동대문이었는데도 말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방향치'라 그런 건 아니었다. 이미 나는 종로5가에서 U턴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사실 P턴(좌회전이나 U턴을 하기 위해 우회전을 해서 한 블록을 끼고 도는 것)을 해야 하는 곳이었지만, 그걸 몰랐던 나는 괜한 오기를 부리며 U턴 표지판만을 찾아 직진을 했던 것이다. 엉뚱한 방향으로 30분을 갔다가 같은 시간을 다시 투자했을 때는 결국 제자리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 표지판이 있었으면 좋겠다. 위험하니 속도를 늦추시오. 막다른 길이니 우회하시오. 터널이 나오니 라이트를 켜시오. 차선이 줄어드니 양보하시오. 사막을 횡단할 때도 태양과 별을 보며 방향을 가늠하는데, 30대 여행길에는 나침반 역할을 해줄 무언가가 없었다. 누군가 가리키는 곳으로 갔다가 낭패를 보기도 했고, 파란불에 건너던 횡단보도는 어느새 빨간불로 바뀌어버렸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왔던 길로 돌아가란 말이 있다.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나이기에,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다시 점검해야 했다. 카피라이터 삶에 만족하고 있는가. 카페 창업은 여전히 나에게 낭만적 밥벌이인가. 결혼이 절박한 나이에 마음 또한 동의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 모든 고민을 아우를 수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 묵직한 인생의 현안들을 배낭에 꾹꾹 눌러 담고 여행을 떠났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속초, 태백, 부산, 통영, 해남, 전주, 안면도, 말레이시아 랑카위, 일본 도쿄…… 나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 앞에서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책을 준비하며 언제나 드는 생각은 한 가지다. 이 책이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자신의 고민도 버겁기만 한 세상에 남의 고민을 엿본다는 것이 과연 유쾌한 일일까? 학창시절 시험을 망쳤을 때 가장 큰 위로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만나는 것이었다. '다음에 잘 보면 돼'라는 위로보다 '나도 망쳤어'라는 푸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던 기억이 난다. 고민이 많을수록 사람은 외로워진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민은 자기 고민이기에, 어설픈 위로보다는 너만 그런 게 아니야란 말을 건네며 어깨동무를 하고 싶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변의 30대들은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멀쩡하게 잘살고 있는 것 같은 친구 녀석들조차 술 몇 잔에 고민남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나만 그런 게 아니군, 이라며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학창시절에 겪었던 사춘기가 지금에 와서 아름답게 기억이 나듯, 먼 훗날 오늘의 내 모습을 좋게 기억하려면 최선을 다해 고민하고 치열하게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함께 여행하며 고민을 공유해준 만화가 이크종과 삼십대가 되도록 철들지 못한 막내아들 때문에 마음 무거우신 부모님, 일본에서 진짜 어른으로 살고 있는 친구 영제, 좋은 자극을 주는 술소나 친구들, 영원한 단짝 일성이에게 내 몫의 행운과 건강을 떼어주고 싶다.
2011년 4월
바다전망 호텔이 보이는 어느 호텔방에서
KIKIBON.
부족하기만 한 나의 첫 책을 읽어준 특이한 독자들에게 보은하고 싶었다. 웃을 일 별로 없는 이들의 팍팍한 일상에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주고 싶었다. 일이, 사랑이, 인생이 잘 안 풀린다고 몇 명 안 되는 내 소중한 독자들이 바위처럼 묵직한 한숨을 쉬지 않았으면 좋겠다. 삽질이 일과인 양 살아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키키봉을 위안 삼아 '그래도 난 쟤보다 나아'라며 행복을 확인하며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