뮈세는 친구 에두아르 부셰에게 바친 시에서 이렇게 썼다. <자네는 라마르틴의 시를 읽고 이마를 치더군. …… 아, 자네 심장을 치게, 천재성이 거기 있으니. 연민, 고통, 사랑이 있는 곳도 거기라네.> 우리말로는 심장보다 가슴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런데도 번역어로 심장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직접 이 책을 읽고 헤아려 보길 바란다.
피가 앙주에게 묻는다. 〈독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앙주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비결은 없어. 그냥 펼쳐서 읽으면 돼.〉 〈읽어 봤을 테니 그냥 내용을 이야기해 주면 되잖아요.〉 〈독서는 남이 해줄 수 없는 거야.〉 삶도 독서와 다르지 않다. 직접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젊음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을 들여 획득해야 하는 재능이다. 피의 표현에 따르면, 〈쓸데없는〉, 다시 말해 다른 것으로 환산되지 않는 활동을 하면서, 오로지 사는 즐거움을 위해 살면서 획득하는 것이다.
작가가 글쓰기를 통해 상실의 아픔을 준 존재를 부활시키고자 하는 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하지만 아멜리의 경우에는 위에서 말했듯 방식이 독특하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서〉, 다시 말해 일인칭 관점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쓴다.『갈증』에서 예수에 빙의해 이미 실험한 바 있는 이 방식은, 열두 살 때 겪은 비극적 사건 이후로 죽음에 사로잡힌 작가가 사라진 존재와 나누려는 〈영적인 소통〉의 열망,
그리고 역설적으로 삶이 주는 쾌감에 대한 집착을 드러내는 장치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신비주의적 성향은 대개 검은색을 띠는 유머와 함께 작가의 작품 세계를 특징짓는 주요한 기제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