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 한 편 쓸 때는 주인공 각각의 삶에 깊이 들어가 있었던 탓에 의식하지 못했다. 흩어져 있던 글들을 모아놓았더니 보인다. 느닷없이 낯선 곳에 부려졌거나 갓 인생을 시작한 듯 서투르고 불안한 몸직으로 자신의 삶을 부유하듯 서성이는 사람들과 스스로 택했던 주어졌건 자신의 삶의 자장 안에서 기를 쓰며 살아가다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여기 모인 글들은 그러므로 삶의 불안에 대한 기록들이라 해야 할 것이다.
첫 소설집을 묶기 위해 내가 쓴 것들을 모아 추려 봤더니 맨 시시한 사람들의 시시한 삶에 관한 이야기투성이다. 긴 몸에 유난한 곱슬머리와 잘 웃던 작은 눈을 가졌던 나의 동갑내기 이종 사촌이 생각난 건 그래서일 터이다. 놈은 시시하게 살기 싫었던지 스물여덟 살에 트럭을 몰고 저세상으로 훌쩍 건너가 버렸다. 나는 시시한 살림살이를 특별하게 만드느라 나날이 시시하다.
늘 안팎의 억압에 찌들려 살았다는 우리 땅 백성들, 우리 선조들 삶에 태생을 넘어설 수 있는 평등과 자유를 인생의 지표로 삼고 움직였던 사람들이 존재했더라면 재미있지 않을까. 혹은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숨어 있지 않을까.
사신계가 그렇게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사람살이의 핍진함에 있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 숱한 사람들의 곤고함이 사신계의 자양분이었다. 유사 이래 무당이 존재했고 존재 할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사람들의 맺힘을 풀고 고통을 덜어 주는, 진정한 의미의 무녀로 다시 태어난다.
고통이 있는 곳에 꿈과 현실이 어우러진, 눈물과 웃음이 한 장단을 타고 쏟아지는 해원(解寃)과 비원(悲願)의 굿판이 벌어진다. 현실과 비현실이 상통하는 굿판처럼 <반야>도 두 세계를 경계 없이 드나든다. <반야>의 주인공은 반야가 아니라 사신계 사람들이다.
늘 안팎의 억압에 찌들려 살았다는 우리 땅 백성들, 우리 선조들 삶에 태생을 넘어설 수 있는 평등과 자유를 인생의 지표로 삼고 움직였던 사람들이 존재했더라면 재미있지 않을까. 혹은 어딘가에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 숨어 있지 않을까.
사신계가 그렇게 오랜 세월 지속될 수 있었던 까닭은 사람살이의 핍진함에 있었다.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 숱한 사람들의 곤고함이 사신계의 자양분이었다. 유사 이래 무당이 존재했고 존재 할 이유와 같다고나 할까. [……]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사람들의 맺힘을 풀고 고통을 덜어 주는, 진정한 의미의 무녀로 다시 태어난다.
고통이 있는 곳에 꿈과 현실이 어우러진, 눈물과 웃음이 한 장단을 타고 쏟아지는 해원(解寃)과 비원(悲願)의 굿판이 벌어진다. 현실과 비현실이 상통하는 굿판처럼 <반야>도 두 세계를 경계 없이 드나든다. <반야>의 주인공은 반야가 아니라 사신계 사람들이다.
여기서도 사랑에 관해 물으려던 건 아니었다. 사랑을 이야기 하려던 것도 아니다. ‘결혼 이주민 여성’으로 불리는 사람들. 꿈을 좇아 찾아든 이방(異邦)에서 꿈을 이루려 애쓰는 젊은 삶에 대해 이야기 하려 했다. 스스로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 줄 깨닫지 못한 채 별처럼 빛나는 것들을 향해 줄달음치는 젊음과 그 젊음을 맞아들인 ‘우리들’의 삶을, 하얼빈 출신의 조선족 여성을 통해 그려보고자 했다. 한국의 대 스타 ‘비’를 좋아하는 최부용, 희망 없는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처럼 보이던 한국을 찾아온 그. 한국에 오기 위해 선택한 결혼과 이방인으로서의 삶. 사방에 잠복돼 있다가 삶의 발목을 잡아채는 덫들.
따라서 <사랑을 묻다>에 이른바 사랑이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할 여지가 처음에는 거의 없었다. 사랑으로 부용의 삶을 희석시키지 않을 작정이었다. 부용이 마주한 유, 무형의 온갖 편견과 억압들에 맞장 뜨듯 대들어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부용의 꿈과 삶, 그 빛남과 쓸쓸함에 관해 얘길 하자니 날마다 먹지 않으면 안 되는 밥처럼 사랑이 필요했다. 사랑이 아니라면 이방인인 부용이, 너무 젊은 그가 살아내야 하는 삶이 혹독했기 때문이다. ('작가 후기'에서)
기절을 했던가. 깨어났더니 저녁이었다. 담장엔 횃불이 꽂혔고 감나무 가지며 처마 밑엔 호롱불이 매달렸고, 덕석 깔린 마당 가득 사람들이 북적이고, 모깃불이 사방에서 일렁이고 술 냄새와 고기냄새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은 말복 날이었고 말복엔 온 집안사람들이 모여 천렵을 한다는 걸 그때 나는 알았던가, 몰랐던가. 그 해엔 우리 집이 개를 내놓을 차례라는 설명을 그때 들었던가, 나중에 들었던가. 명확한 것이라고는 내가, 저 죽을 줄 알고 한사코 피해 다니던 녀석을 불러들여 목에 올가미를 씌우고 나무둥치에 매달았다는 사실뿐이다.
그 뒤 폭력이라는 단어를 만나고 그 뜻을 알게 되었을 때 맨 먼저 떠올린 게 그 장면이었다. 그 사건은 내가 처음으로 행사한 폭력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당한 폭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이 들면서 폭력이라는 단어와 밥 먹듯이 만나야 했다. 60년대와 70년대로 갈리던 무렵, 미처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았던 시골 마을에서 한 계집아이한테 벌어진 천렵사건쯤은 폭력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걸 수시로 깨달아야 했다. 최소한 그때 그 장면에 악의는 어려 있지 않지만 그 또한 폭력이었다는 사실도.
이 <꽃살문 전설>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폭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면서 행하는, 악의 서린, 어쩔 수 없는, 사랑이나 아름다움이나 운명의 이름으로도 저지를 수 있는, 온갖 명분을 둘러쓰고 자행되는 치명적인 그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