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생 후반기에 들면서 보다 능동적이고 실효성 있는 ‘참여(engagement)’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물론 자신은 사회변화를 선도할 만한 지혜나 용기가 부족하고 적극적 사회운동가로 나서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다소의 사회적 부조리쯤은 과감하게 포용해가며 새로운 질서를 주도해 나갈 관리능력도 없다는 스스로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제시하고 실천해 나가는 일을 남들과의 협력을 통해 추구하되 자신은 주로 이들을 후원하고 격려하는 일에 전념하는 것도 보다 성숙된 단계의 앙가주망이 될 수 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아마도 내가 경제학도로서의 길을 선택했던 시절부터 잠재해 있던 인식과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재학시 Alfred Marshall(1842~1924: J. M. Keynes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대표적 경제학자)의 저서 Principles of Economics(1890)를 읽으면서 접했던 “warm heart and cool head(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라는 짤막한 경구가 평생 나의 뇌리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냉철한 이성으로 경제 문제를 연구하되 어디까지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며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제대로 실천하는 길은 바로 인간에 대한 올바른 섬김(servantship)에 있다는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나는 부지불식간에 이미 능동적 차원의 앙가주망 이념에 근거한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차원에서 본서의 제목으로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라는 경구를 택하게 되었다.
내 몸에 맞는 내 글 쓰기로!
2016년 봄 성남아트센터가 율동공원의 책 테마파크에 개설한 문학아카데미 수필 반에서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정년 이후 제2인생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자전적 수필집 한 권쯤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스스로 이 세상 다녀간 흔적을 어떤 형태로든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늦깎이 문학도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도교수가 2018년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문에 지원해 보라고 권고했다. 일단 시도나 해보자는 막연한 심정으로 응모하였는데 얼떨결에 당선소식에 접하게 되었다.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2019년에는 『뜨거운 가슴으로 차가운 머리로』라는 수필집까지 발간하게 되었다. 이어 2022년 봄에는 <월간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 수상자가 되는 영예까지 얻었다. 너무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진 일이라 스스로도 얼떨떨했다. 준비 안 된 자가 어울리지 않은 옷을 걸치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한편 대표에세이 문학회 회원이 된 후에는 틈틈이 전해 오는 선배 문인들의 작품집을 받아보며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확인해야 했다. 글을 더 이상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써야 좋은 글이 되는 줄은 이해할 수 있었으나 실천으로 이어나갈 능력의 한계를 통감했다. 등단과 동시에 비로소 좌절을 맛보게 된 것이다. 수필집을 내었다 하나 엄밀히 말해서 자전적 체험수기에 가까울 뿐 전형적인 수필집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평생을 문학에 대한 이해나 관심이 거의 전무한 이성 위주의 경제학도로 살아왔기에 수필이라고는 했지만 자신의 생각을 논문 쓰듯 체계적으로 전개해 본 수준에 불과하다는 자책감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번쩍하고 떠오르는 단상이 있었다. 애초부터 유명작가가 되려거나 불후의 명작을 남길 의사나 능력도 없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왕지사 자신이 걸어온 배경을 바탕으로 남들과는 다른 주제의 글을 자신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려보았다. 서정성이 풍부하거나 풍부한 인문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서사성이 뛰어난 문학적 수필을 쓸 수 없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일반 독자가 공유?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글을 써볼 수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랬다. 용기 내어 생긴 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남들이 지나쳐버리기 쉬운 주제들을 끄집어내어 글거리로 삼는데 주력해 보겠다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몇 년 전 숙부가 아버지 마지막 유품이라며 전해준 청자화분과 그 속에 담겨 온 가시면류관을 연상하여 쓴 수필(?청자화분과 가시면류관?)을 책 제목으로 정했다. 그러나 책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주제라기보다 대표적으로 내세우고 싶은 글의 제목에 해당한다. 5년 가까이 수시로 습작으로 작성한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일관된 논리로 연계되어 있지는 못한 셈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인생 노년기에 선 필자가 사유해 본 인생사계 또는 생로병사라는 큰 주제 하에서 선별한 글들이다.
제1부는 노년기에 겪거나 사유해 볼 만한 주제를 모아 ‘망각’이란 부제로 모았다. 죽음에 대한 자기철학이 정립되어야 비로소 남은 인생을 유의미하게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리하였다. 제2부는 주어진 여건에서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또 헤쳐 나갈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청자화분과 가시면류관’이란 표제 하에 묶었다. 제3부는 더불어 조화롭게 사는 공존의 방식을 ‘금낭화’란 부제 하에 묶었고, 그리고 제4부에서는 역사 탐방 및 기타 주제에 관한 글을 묶어 ‘탄금대’라 하였다.
이 책은 우선 용인시 문예창작기금 지원을 받아 출판된 것임을 밝혀둔다. 차제에 창작기금지원신청 및 선정과정, 그리고 제반관련업무로 많은 수고를 해주신 용인문협 김안나 회장과 윤문순 사무국장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곰곰나루 강좌를 운영 중인 단국대학교 박덕규 교수의 관심과 배려가 없었더라면 이 책의 출간은 불가능했다는 점을 밝혀둠과 동시에 베풀어주신 많은 도움에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한편 본서를 계획하고 출판하기까지 교정과 편집 등 전 과정에 걸쳐 자신의 일처럼 애정을 쏟아줌은 물론 지치고 힘들 때마다 용기를 북돋아준 아내 박 상옥 교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출판할 수 있도록 용단을 내려주신 곰곰나루 출판사 임현경 대표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