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에게 글쓰기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닿아 있다. 글쓰기가 위협당할 때 그의 존재는 위태롭다. 그에게는 글스기가 다른 어떤 삶의 요구보다 선행한다. 우리 시대 작가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이청준에게 작가란 무엇이며,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청준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추출하고 싶은 핵이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일 것이다.
그 답을 얻는 과정은 쉽지 않다. 먼저 고른 수준을 보여 주는 그의 많은 작품들 중 더 매혹적인 작품들, 더 불편한 작품들을 한 편씩 꼼꼼히 읽고 분석한 다음 다시 종합,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변증법적인 독서 과정일 것이다. 문제는 아둔하기 짝이 없는 내 머리와 신뢰할 수 없는 내 문학 텍스트 해석 능력이다. 하지만 나는 해보기로 한다. 내 정신의 여정에 함께하는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하기 때문이다.
시를 읽고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 예술 체험의 핵심은 즐거움과 깨우침이다. 우리는 시를 읽을 때 일상 언어를 잠시 떠난다. 그래서 시를 읽는 즐거움은 무엇보다 특별한 언어 사용에서 얻어진다. 삶에 대한 깨우침이 언어를 별나게 쓰는 즐거움보다 앞설 수 없다. 사실 언어를 제대로 별나게 쓰면 삶은 새롭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일상 언어는 의사소통과 정보 전달과 감정 표현을 위한 기능적인 것이다. 그런 일상 언어를 비틀면 세상에 금이 가고 투명했던 기존 가치, 관례, 세계관이 불투명해진다. 불투명한 세상 속에서 삶은 알 수 없고 모호해진다. 그 삶을 어떻게 일상 언어가 드러낼 수 있겠는가.
시를 읽는 사람은 언어를 일상이 아닌 다른 차원에서 체험한다. 시를 읽은 후, 그 사람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없어도 괜찮다. 예술 체험을 통해 낯선 삶에 대해 회의했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