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담은 문학, 연극, 음악, 미술 등 각 예술분야의 철학, 역사, 과학, 국제정치 등 각 학술분야의 대가들을 총망라한 것이었다. 내가 이들과 회견한 것은 20세기의 4.4반기가 막 시작될 무렵이다. 대세기말을 앞두고 세계가 20세기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고 다가오는 새 세기를 대비하고 있을 때였다. 밀레니엄의 대 전환기에 가진 나의 대담들은 곧 20세기의 총람이자 21세기의 조망이었다. 20세기는 어떤 세기였으며 지난 천년의 총화는 무엇인가. 그리고 20세기말은 21세기를 어떻게 예견하고 있었으며 새 천년의 실마리는 무엇인가. 이 책은 그 보고서다.
나는 내 자전을 쓰자는 것이 아니었다. 나의 실록이 무슨 역사적 가치를 자청할 것인가. 다만 내게 있어서 나의 개인사는 나의 국사요, 동시에 나의 고향사다. 나와의 관계없이 내 나라는 없고, 내 고향과의 관계없이 나는 없다. 신문기자로서 나라의 역사를 기록하듯 '고향과 나'의 역사를 기록했을 뿐이다.
모랄리스트의 신풍을 위하여
1.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만인(萬人)의 만문(萬問)에는 만답(萬答)이 있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우문이라고 한다.
세상은 있기 나름이 아니라 생각하기 나름이다.
세상은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
나 없이 세상은 없다.
나는 평생 생각했다.
나는 하루 한 줄씩 생각하고 하루 한 줄씩 일기처럼 썼다.
2.
누군들 생각하지 않으랴.
생각하는 방법이 다르고 표현하는 양식이 다를 뿐이다.
세상은 정면으로 쳐다보면 태양을 쳐다보듯 보이지 않는다.
“누이의 어깨 너머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세상은 보자.” [서정주, 「학」]
다면체인 세상은 평면적인 채색으로는 그려지지 않는다.
무수한 색점들을 병치시킨 인상파의 점묘 화법으로 세상
의 인상을 스케치한다.
단편(斷片) 속에 전경(全景)이 있다.
단답 속에 명답이 있다.
3.
문약의광(文約意廣)이라 하고 미언대의(微言大義)라 한다.
글은 간략하되 뜻은 넓고, 말은 미미하나 뜻은 크다.
글이 짧을수록 생각은 길다.
“정확한 것은 짧다.” [조제프 주베르, 『팡세』]
시를 산문으로 쓴다.
산문을 시보다 짧게 쓴다.
아포리즘 형식은 인삼 엑스 같아서 물을 타지 않으면 입에
쓰다.
4.
태초에 단장(斷章, fragment)이 있었다.
탈레스 등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사상가들은 모두 단장 작가였다.
인류의 원초적 사색들은 1, 2행짜리 단장으로 기록되었다.
『구약성서』의 「잠언」이나 「전도서」의 잠언들도 단장 형식이다.
동양에서는 공자도 노자도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상가들이었고, 『노자』가 단장집임은 물론, 『논어』 등 제자백가서가 모두 단장의 보고다.
5.
내가 라로슈푸코를 발견한 것은 나의 신대륙이었다.
몽테뉴의 『수상록』 이후 파스칼의 『팡세』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모랄리스트(Moraliste) 문학은 특히 라로슈푸코의 『잠언과 성찰』에서 주로 짧은 잠언 형식으로 만개되었고, 이것이 라브뤼예르, 보브나르그, 샹포르, 주베르 등으로 계승된다.
모랄리스트 문학은 인간의 본성과 심리와 습속을 예리하게 분석・탐구하여 신랄한 풍자와 현란한 수사로 극도로 응축・조탁된 간결하고 함축 있는 문장 속에 표현한다.
인간론・인생론의 잠언들과 함께 포르트레(Portrait)라 하여 작자 자신 등 여러 인물들을 소묘하면서 인간 일반의 성격 묘사를 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로마에 이른 단장의 전통이 인간을 재발견한 르네상스와 함께 재발견된 것이다.
6.
“프랑스의 대작가들은 다소간에 다 모랄리스트다.” [발레리]
프랑스의 영향으로 구미의 다른 나라들에도 모랄리스트는 산재한다.
우리나라에는 모랄리스트의 문풍이 없다.
이 단장집은 우리나라 모랄리스트의 신풍을 위한 한 모형이다.
욕지도‘돌아가는 배’에서 - 책머리에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만인(萬人)의 만문(萬問)에는 만답(萬答)이 있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우문이라고 한다.
세상은 있기 나름이 아니라 생각하기 나름이다.
세상은 자기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다.
나 없이 세상은 없다.
나는 평생 생각했다.
나는 하루 한 줄씩 생각하고 하루 한 줄씩 일기처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