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서산에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왔다. 노루 꼬리처럼 깡총한 서울 말씨에 비해 유난히 느리고 촌스러운 충청도 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악동들은 나를 ‘촌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친구를 만들 사이도 없이 ‘촌닭’이 되어 버린 나는 외로울 때마다 고향으로 편지를 썼다. 물론 속내는 꽁꽁 감춘 채, 나는 잘 있으며 선생님과 친구들이 보고 싶다는 형식적인 편지였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편지를 쓰지 않았다. 수돗물에 씻긴 얼굴이 반들거리고 말꼬리가 노루 꼬리만큼 짧아졌을 때였을까? 확실한 것은 ‘촌닭’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대신에 친구 몇 명이 생겼을 때라는 거다.
세상에서 가장 부끄럽게 여겼던, ‘촌닭!’ 그 아이를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은 동시를 쓰면서부터다. 그 아이를 만나지 못하면 모기를 보는 순간 모기약부터 집어 드는 어른 괴물이 되어 있었으니까. 눈빛 반짝거리는 생쥐와 마주치는 순간 소리부터 꺅! 질렀으니까. 그러면 모기 대신에 죽는 것은 동시이며 달아나는 것은 생쥐가 아니라 동시인 것이다.
“아이야, 아이야! 그리운 촌닭 아이야!”
주문을 외우듯이 간절하게 불러서야 나타난 아이는 꾀죄죄한 이마에 나 있는 조그만 뿔로 나를 위협했다. 마른침을 겨우 묻혀서 붙인 탱자나무 가시 뿔이었다.
“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진짜 동시는 한 편도 쓰지 못할 거야.”
그런데도 걸핏하면 한눈을 팔았고, 5년 만에 묶는 동시집 앞에서 나는 또 이리 부끄럽다. 산만한 걸로 치면 아이보다 어른이 훨씬 심하다는 거다. 다시는 한눈팔지 말아야지. 이제부터라도 ‘촌닭’ 그 아이의 말을 잘 드는 커다란 귀를 가진 어른이고 싶다.
이민 온 지 6개월 정도 되었던, 초등학교 5, 6학년 남매에게서 들은 얘기였다. 감수성이 한창 예민한 때에 느닷없이 생소한 문화 속으로 옮겨졌으니 당연했겠지만, 조카들은 내 짐작보다 훨씬 많은 아픔과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부모가 걱정할까 봐 혼자만 끙끙거렸던, 일찌감치 철이 들어버린 조카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짠했던 기억이 난다. - 저자의 말
실험쥐는 죽으면서 운대요
실험쥐는 우리나라 실험동물의 80%를 차지할 만큼 많은 연구에 쓰인다고 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짧은 기간을 살다 가지요. 그나마 불안과 공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다가 말이에요. 동물 연구는 인류의 생명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힘없는 그들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정말 무섭고 힘센 동물일 거예요.
실험쥐들은 죽을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눈물을 흘릴까요? 억울하다는 생각이 제일 클 것 같습니다. 태어나기를 실험실의 연구용으로 태어나서 괴롭힘만 당하다 죽으니 말이지요. ‘쥐들은 인간에게 복수하고 싶을 거야. 몸을 키우고 숫자를 불려서 인간들과 맞서 싸우고 싶을 거야.’ 이런 생각이 동화를 쓰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주인공 ‘쥐뿔’은 미키마우스처럼 엉뚱하고 발랄할 수는 없어요. 인간들의 생명 연장을 위해서 온갖 연구가 진행 중인 연구소에서 살아가던 생쥐니까요. 머리엔 십자가 모양의 암세포가 자라고 있고요. 죽을 날을 하루 앞두고 우두머리의 도움으로 연구소를 탈출하는데, 얼떨결에 ‘파상풍’이라는 꼬마까지 데리고 나와요. 그의 조상이 사는 마을까지 데려다 주어야 하니 얼마나 험난한 길이겠어요.
쥐뿔은 바깥세상에 나와서야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들을 괴롭히는 인간들과 맞서 싸우려는, ‘혁명’을 꿈꾸는 쥐들이 있다는 것! 이미 집토끼만큼 커다래진 쥐들이 백곰처럼 몸을 키우기 위해서 날마다 묘약 개발에 힘을 쓰면서 훈련을 일삼고 있다는 것! 그들이 언젠가는 연구소를 공격할지도 몰라요. 그곳에서 고통 받는 친구들을 구해내려고요.
나는 이 동화를 통해서 어린이들에게 생명의 귀중함과 가치에 대해서 들려주고 싶었어요. 전자게임을 즐기는 요즘 아이들 속에 강한 것만이 최고라는, 삐뚤어진 생각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병아리를 벽에 던지며 누구 병아리가 오래 버티나 내기를 한다든지 애완동물을 버리거나 학대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거든요. 숨 쉬고, 움직이고, 먹고, 마시고, 생각하는 동물로 귀하긴 마찬가지인데 누가 누구의 생명을 마음대로 한다는 말인지요. 우주의 모든 동식물이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고 그로 인한 질서가 있을 텐데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요.
어떤 연구소에선 실험쥐를 위한 위령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빵과 과자를 앞에 놓고 묵념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도 그들을 위해서 잠깐 묵념을 해요. 우리가 받고 있는 의료 혜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희생에서 비롯된 거니까요. 그리고 나는 특별히 『뿔 난 쥐』에 나오는 쥐들에게 따뜻한 눈물 한 병을 바칠 거예요. 부디 실험도 없고 고통도 없는 ‘쥐들의 천국’으로 가기를 기도하면서 말이지요.
아기 새가 아파트 복도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옥상에서 부화한 새가 이소하다가 잘못 된 것 같았습니다.
나는 가쁜 숨을 할딱거리는 아기 새를 데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서둘러 물을 먹이고, 미숫가루를 타서 주사기로 먹였더니 다행히도 기운을 차렸습니다.
부쩍부쩍 자라난 아기 새는 꽁지가 기다란 지빠귀 종류였습니다. 다른 새의 소리를 흉내 내기도 한다는 똘똘한 새였지요. 실제로 주인을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똑순이라고 지어주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똑순이가 노래를 했습니다. 아주 조그만 소리였는데 신기해서 들여다봤더니 뚝 그쳤습니다. 그리고 몰래몰래 연습하더니 어느 날인가 멋진 노래를 불렀습니다. 허공에 구슬이 구르는 것처럼 맑고 고운 소리로 짝을 부르는 거였지요. 그래서 똑순이를 보내주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똑순이가 그립습니다. 분꽃 씨처럼 까맣게 빛나던 눈이며 노랫소리가 귀에 쟁쟁합니다. 동네에 날아다니는 지빠귀를 보면 무조건 똑순이라고 우기기도 하지요.
내가 쓰는 동시도 똑순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과 먹이를 주어 똑순이를 길렀다면 동심은 시적 상상력으로 길렀지요. 서툴던 똑순이의 노래가 날마다 연습을 거쳐 아름다운 노래로 완성이 된 것처럼 동시도 그렇습니다. 수도 없이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통해 한층 아름다운 노래가 되고 날개에도 힘이 붙는 거니까요.
똑순이가 세상 속으로 훨훨 날아갔던 것처럼 이제는 나의 시들을 세상으로 날려 보냅니다. 부디 많은 독자를 만나 아름다운 노래로 기쁨이 되고 위로가 되면 좋겠습니다.
이처럼 황량한 사막을 함께 가는 또 하나의 나를 많이 연민했고, 때로는 지겨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링없이 이 길고 지루한 생의 사막을 그녀와 함께 건널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어둠과 추위, 한 치의 앞도 가늠할 수 없게 부는 황사바람과 땡볕. 다만 여기에 내 막막한 발자국을 아프게 받아 적어준 모래밭이 있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