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만큼 상투적인 것도 없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안다. ‘사랑한다’는 말이 얼마나 힘이 없는지를. 때론 작은 위로조차 되지 못하는 게 사랑이다. 사랑은 쉽게 낡아간다. 하지만 그 모든 상투와 낡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서사는 늘 새롭다. 새로운 사랑의 서사가 있어 ‘사랑’은 모든 상투를 이겨낸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서사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매번 다시 태어나는 사랑의 서사가 있기에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믿을 수 있다.
여기 쓰여진 모든 글들은 사랑의 서사를 만들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땅과 기억을, 그리고 텍스트를 다시 발견하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그 모든 비참과 비굴함과 지리멸렬함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랑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역에서 산다는 것은 때로는 일상적 모멸감을 견디는 일이다. 중심을 비판하기는 쉽다. 하지만 우리 안의 중심과 중심에 대한 욕망을 바라보는 일은 쉽지 않다. 2023년과 2024년을 지나오면서 나는 우리 안의 헤게모니와 인정 욕망의 민낯을 보았다. 한때 동지였다고 믿었던 이들이 하나둘씩 권력의 둥지로 깃드는 걸 보기도 했다.
희망이 사라진 시대라고 하지만 절망의 돌부리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 나는 사랑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여기 쓰여진 글들은 그 분투의 흔적들이다.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과잉의 포즈일 이 모든 문장을 써가면서 나는 한 걸음 더 걸을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 걸음에서 만난 사랑의 서사는 늘 새로운 것이었다.
문장의 한계가 오늘의 한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둠만이 가득한 시절이라도, 나의 글이 사랑의 서사를 발견하는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한다. 글을 묶는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독한 시절을 견뎌온 기훈, 재이에게 이 글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읽고 쓰는 동안 이승환의 노래를 들었다. 음악이 있어 무도한 시절을 견딜 수 있었다. 그의 노래를 다시 듣게 만들어준 케이에게 뒤늦은 안부를 전한다. 부디 평안하기를. - 머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