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만 쓸 수 있다면 모든 것이 환해질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욕망이 굳센 믿음이 갑자기 침묵으로 변하는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있었다. 『현대문학』으로 긴 시간에 걸쳐 3회 추천 완료 후 등단한 지 7년 만에 남보다 늦게 첫 시집을 출간했다. 당시 나는 문학적으로 암전 상태였고 모든 것이 불분명해서 꿈꾸는 만큼 어둠이 깊어졌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이형기 선생님께서 어제까지 쓴 시 다 가져오라고 하셨고 그것이 첫 시집이 되었다.
33년이 지나서 첫 시집이 복간되는 시점에 첫 시집을 읽었다. 첫 시집은 맨처음으로 시인이 가진 문학적 언어다. 그런데 분명 내가 쓴 시인데도 나를 배반하는 막막한 모호성이 길게 잠복되어 있었고 이미 벅찬 미래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낯선 세계에 대한 시들은 미미했다.
이 세계에서 시인의 감각이란 누구도 무엇도 전체일 수는 없다. 줄기차게 시를 읽어주는 사람들 앞에 내 시가 줄줄 재발견되기를 바라고 싶을 뿐.
2022년 겨울 - 개정판 시인의 말
시에 대하여 한 번 더 강렬한 두려움을 갖는다.
무수한 질문과 ‘의심’이라는 광증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
시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이중의 미망,
여전히 차이가 무화되는 시집과 시집 사이.
각별한 해답 없이 또 한 권의 시집을 내고 있다.
곧 시는 나로부터 떠난다.
더러는 팽팽해져서 어떤 징후가 되어있기를 바라지만...
나쁜 습관이 있다. 중요한 것을 팔아서 덜 중요한 것을 사버린다. 참으로 무익했다. 어쩌면 나는 하찮은 것에 매혹된 자였고 이 매혹이 나를 매일매일 놀라게 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세상의 중요한 약속들을 어기거나 포기하고 많은 것들과 결별할 때 시가 써졌다.
파의 매운 기분을 사랑했다. 온 군데 매운 파를 심어놓고 파밭에 나가 있었다. 그들은 힘껏 파랬다. 파밭에 서 있으면 쓰라린 파의 목소리가 올라왔다.
2015년 여름, 파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