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각과 성찰의 입장을 견지하며 부끄러운 이 글을 썼다.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점검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미술관 기행이 주조면서도 기왕에 출간된 미술관 기행 책자들과 차별성을 나타낸다. 우선 식민사관에 대한 점검에서 이 책은 자유롭지 않다. 여행 내내 나를 긴장시킨 것은 서양 콤플렉스에 관한 것이었다. 서양의 미술작품을 중심으로 서양 콤플렉스의 요인을 검토함으로써 우리의 근대는 물론 현대의 시작과 그 의미를 묻고 싶었다.
나는 이 책에서 위축된 시의 위상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변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랜 세월 동안 시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밝히고 아울러 지금도 우리 주위에서 생생하게 숨 쉬고 있다는 것만은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시는, 통상 '시'라는 특정 텍스트로 우리 앞에 제시되기도 하지만, '시적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 주위에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적 텍스트)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우리가 방문하기를 고대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존재를 간파하지 못하고 그것의 가치를 모를 때가 많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 요인이다. 이런 까닭에 사랑과 죽음에 관한 논의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 에로스는 삶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이를 통해 생의 의욕을 다지는 충동이고, 죽음의 본능, 즉 타나토스는 말 그대로 파괴 본능으로서 일체를 해체하고 파괴하는 충동적인 힘이다. 그리고 인간은 삶의 충동인 에로스와 죽음의 충동인 타나토스 사이에서 긴장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존재다.
이들은 자신이 감내해야 했던 예술적 고뇌와 번민을 선구자적 고통으로 수용했고, 시대적 폭압에 의해 기꺼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런 고통의 삶을 그동안 방치했다. 고작 속화시킨 이중섭, 구본웅 등을 떠올릴 정도 아닌가. 이 책은 독선과 광기로 세계와 불화하며 자신의 시대를 접수하고 거침없이 예술에 순교했던 이 땅의 화가에 대한 헌사이며 비망록이다.
그림은 삶이 이력서다. 나의 젊음을 지켜준 충직한 파수꾼이다. 상처투성이의 나와 대면케 하는 여정의 안내자이며, 영혼의 문이다. 허기진 정신을 해갈하는 수원(水源)이다. 그림은 내가 존재하는 한 절대 나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기관차처럼 맹렬하게, 시간의 이면으로 나를 초대할 것이다. 확언컨대 이러한 성향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거세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