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국민(초등)학교 다닐 때, 내 살던 산골은 순흥안씨 집성촌이었는데 친구 아버지는 방고개 비탈진 밭을 봄부터 참외밭으로 가꾸고 있었다. 그 고개를 넘어 다시 더 큰 놋재라는 고개를 넘어야 읍내 학교가 나타나는 등굣길이었다. 그때마다 친구 아버지는 나보다 일찍 그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을 보았고 점차 노란꽃이 피고 덩굴이 벋더니 달걀만 한 열매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여름방학이 되자 참외는 익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친구 아버지는 지게에 조개발을 얹고 참외를 따서 짊어지고 먼 읍내로 향하였다. 그런데 한 이틀 지나 엄마를 통해 나에게 그 밭 원두막에 자며 지켜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신이 났다. 숙제거리를 책 보따리에 싸서 갔다. 원두막이라는 것이 그것도 2층이라고 시원했고, 더구나 친구 아버지가 밥을 가지고 와서 밭둑 가 작은 도랑 찔레 덩굴 아래 옹달샘에 두고 참외를 팔러 고개를 넘는 것을 보고는 얼른 내려가 챙겨와 물에 말아 훌쩍훌쩍 주린 배를 채우곤 했다. 그 찔레 덩굴에 곁 바위더미에는 너구리 굴이 있었다고 했지만 난 무서움을 덜 타는 체질이었다.
그보다 밤이면 이제껏 이 나이가 되도록 잊지 못하고 내 눈에 그대로 각인된 것이 있다. 바로 밤하늘이었다. 멀리 반딧불이 날고, 어둠이 깔려오면 그 어떤 불빛도 없는 곳이라 원두막에 누우면 하늘의 별이 쏟아진다. 북두칠성을 중심으로 자연책에서 배운 별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오리온자리, 사자자리, 큰곰자리, 전갈자리 등 이름도 신기한 그 별무리를 찾아보려고 눕는 자세를 바꾸면서 맞추어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은하수는 너무 맑았고 견우직녀 이야기는 소년의 상상력에 소고삐를 잡고 하늘 밖으로 끝없이 유영(遊泳)해 갔다. 가끔 종횡으로 쏟아지는 별똥별은 또 어땠던가? 그러한 경험은 나에게 평생을 두고 꿈처럼 남아있다. 그 뒤 알퐁스 도데의 ≪별 이야기≫나, ≪알프스의 소녀≫,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별에 대한 표현은 언제나 내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잊고 살았던 그 ≪별 이야기≫가 이 ≪大戴禮記≫ <夏小正>편에 계절마다 거론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이는 문학적 표현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대 별자리만을 다룬 전문적인 기록도 아니다. 그저 아주 먼 상고 하(夏)나라 때, 1년 열두 달, 농사와 계절별로 변하는 동식물의 출몰과 생태계의 신비함을 일상에 맞추어 기재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지금처럼 구체적이고 명확한 과학적 근거도 희박하다. 아울러 문학도의 호기심을 끌 만큼 서사성(스토리텔링)을 갖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그 먼 하나라 때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에 별이라는 것이 스쳐가듯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나는 늘 ‘별’이라는 말에는 연예계나 스포츠계, 혹 위력이나 위대한 업적의 ‘스타’라는 의미는 전혀 와 닿지 않고, 그야말로 어릴 때 보았던 하늘의 구체적이고 물리적, 천체의 ‘별’ 그 자체이며, 거기에 소년 시절이었다는 나이에 상흔(傷痕)처럼 남은 채 더 이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응고되어 정지해 있다.
그래서 고향 유와려(酉蝸廬)는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그 어떤 빛도 간섭이 없는 황정산(黃庭山) 원통암(圓通庵) 아래에 있어, 갈 때마다 별을 보리라는 기대에 흥분되어 찾아가곤 한다.
그리하여 이 <하소정>을 읽어보았지만 감도 잡을 수 없었고, 나아가 중국 고문에서 고어(古語) 중의 고어인 하나라 때의 어휘는 뜻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포기하려다가 별 이야기만 나오면 다시 상상에 빠지곤 하여, 할 수 없이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그 외의 다른 편(篇)의 기록도 녹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별에 꽂힌 그 흥분과 어린 시절 그 꿈의 추억 때문에 결국 해내기는 하였다. 아마 사람마다 다름으로 해서 전혀 달리 느끼는 이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 책은 그저 중국 고대 경서(經書)의 한 가닥이요, 고리타분한 ‘孔子曰’ 운운하는 고전일 뿐이다. 감동을 주는 책이 아니라 윤리 도덕을 따지고 치도와 덕치를 논하는 예(禮)의 곁다리이다.
더구나 봉건시대 남존여비의 틀로 여인들을 숨도 쉬지 못하게 조여 묶었던 ‘삼종지례(三從之禮)’니 ‘칠거지악(七去之惡)’이 바로 이 책에 처음 실려 있기도 하니 비판도 없지 않은 책이다. 다만 연구와 공부에 고전은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나아가 오히려 이를 통해 반면교사로 삼을 것도 찾아내어야 하기에, 자료로 제공하는 것이다.
아울러 워낙 난해한 내용과 글자들이 많아 제대로 시원하게 밝혀내지 못한 부분도 너무 많을 것이다. 이 책을 대하는 자가 헤아려 주기 바란다.
2024 갑신년 정월 莎浦 林東錫이 丹陽 黃庭山 圓通庵 아래 酉蝸廬에서 적음.
재물은 천만금 남겨 주어도 이를 지켜 내기 어렵지만 바른 삶의 방법을 일러 주면 제 자신으로서는 이 난득의 인생을 나름대로 터득하고 행복을 맛보며 주위와 위아래 사람에게 제구실을 할 것이요, 나아가 사회와 인류를 위해 바른 가치를 실행할 것이 아닌가? 그것이 진정 부모가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모든 집집마다의 '가훈'일 때 세상은 더욱 아름답고 다툼 없는 화평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이를 위해 이 책은 충분한 지침서가 되고도 남으리라 확신한다. - 임동석 (역자)
이 책이 사실 조선시대에 우리에게 들어왔다면 벌써 "명심보감"과 쌍벽을 이루는 중요한 처세서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도 확실치 않은 통속적인 책은 수입이 간과되기 쉬웠고, 유학자는 중요한 학술 서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나쳤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책이 국내에 소개되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을 참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스스로 작은 위로로 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