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명나라에 사신을 갔던 ‘조천’朝天은 외교 실무에 치중해 다소 경직된 면이 있었다. 반면,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유연해진 18, 19세기에 ‘연행’은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연행’은 이미 공적 루트를 통한 사적 여행의 하나로 여겨졌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허브hub인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 그 길은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참여하는 만큼 무수한 욕망이 교차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선비들은 청나라 지식인들과의 우정을 꿈꾸고, 역관이나 마두배는 험한 노정, 번잡한 행정을 감수하며 경제적 이익을 꿈꿨다. 어떤 목적으로 사행 길에 참여했던 간에, 큰 테두리 안에서 보면 이들 모두 ‘여행자’였다.”
“특히 19세기로 접어들면, 연행의 의미는 그 무게 중심이 점차 북학에서 교유로 옮겨 가고, ‘개인적 체험’ 위주로 기록하는 성향이 뚜렷해진다. 따라서 진지함의 무게를 한층 덜어 내는 글쓰기 경향을 보인다. 금서를 숨겨 오며 느끼는 스릴, 만리타국에서 고삐 풀린 말을 타다 혼쭐이 난 사연, 서양 여인을 처음 본 소회 등은 19세기 대다수의 연행록이 지닌 ‘조선 남성의 사적 기록’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18세기 연행록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사진관이나 공중 목욕탕 체험기 또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