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유독 왜 슬픔만이 세상 끝까지 뻗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기쁨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어째서 슬픔 뒤에 다시 슬픔이 남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슬픔은 범속한 나뿐만 아니라, 세상 이체에 두루 통해 있는 성인들까지도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젊은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성인은 슬픔은 온통 슬픔 전체일 뿐, 다른 무엇의 대대(對待)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에도 본래 짝지을 것이 없다고. 하늘이 천둥 번개를 친 다음 노하는 것을 보았느냐고. 언제 시체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더냐고!
세번째 시집을 엮으면서 역시 나는 내 그릇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 내게 주어진 일은 남은 시간 동안 불과 몇 밀리라도 비좁은 그릇을 넓혀가는 것이리라. 애초에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내 잘못은 아닐 것이다. 마음속의 스승들께 부끄러운 책을 바친다.
1990년 5월
가속기와 브레이크 페달을 번갈아 밟을 때처럼 내 글쓰기가 지나친 갈망과 절망으로 울컥거리기만 할 때, 평소에 좋아하던 다른 나라 시에 말붙이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내 관심사는 인용된 시를 빌미로 하여, 대체 나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맘때, 한참 억지를 부리고 난 아이처럼 멋쩍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말로 시를 옮기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2006년 여름 경주에서 신사 시대 진흙으로 빚은 불상들의 전시가 있었다. 이 전시회의 표제인 來如哀反多羅는 신라 향가인 풍요(공덕가)의 한 구절로서, ‘오다, 서럽더라’의 뜻으로 새겨진다. 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이 이두문자를 의역하면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맞서 대들다가,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로 이해되는데, 그 또한 본래의 뜻과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오래전부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시들을 같은 제목으로 엮어보고 싶은 은밀한 바람이 있었다.
2012년 겨울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세상과의 연애를 통해서 제가 깨우친 바가 있다면 삶의 의미는 끊임없는 배움에 있으며, 그 배움은 공경하는 마음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보다 더 자세하게 살피자면 배움은 다름아닌 공경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현들이 모든 부는 공경 경(敬) 자 한 자에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제가 함부로 괴물 같은 세상 앞에 갖다붙인 완강한 물음표를 이제 자신에게 옮겨놓으려 합니다. 앞도 뒤도 알 수 없는 막막한 세월 속에서 구원도, 해탈도 아닌 막막한 걸음걸이, 우리는 모두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막막함을 함부로 제멋대로 제 편한 것으로 바꾸어버리지 않고 그 길을 끝까지 가는 것, 모든 공부는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같은 것입니다.
지금 저는 영문자 Q로써 제 시적(詩的) 여정을 생각해 본답니다. 저는 이제 원래 시작했던 지점에 다시 왔고(이번 책 세 권이 Q의 마지막 궁글림에 해당하지요), 이제 그 남은 꼬리 부분이 여우 꼬리처럼 길지, 아니면 돼지 꼬리처럼 짧을지, 지금의 저로서는 알 수 없지요. 어떻든 남은 여생?꼬리가 원래 출발했던 그 지점, 즉 1976-1985년의 지점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을 거라는 점은 짐작할 수 있어요.
...참으로 신기했던 것은 내가 사진에서 보았던 선과 면으로 실제의 오름을 분해하고 재구성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따지고 보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제주에서 머무는 동안 나는 고 형이 포착한 오름의 도형에 말을 거는 일, 다시 말해 언어라는 잊리적 렌즈로 사진 속의 오름을 재분해하고 재구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고, 오랜 게으름과 우여곡절 끝에 이제서야 말문을 트게 되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지드의 <좁은 문>은 사랑이라는 환상의 발생과 진행, 쇠퇴와 소멸에 관한 총체적인 보고라 할 만하다. 또한 사랑이라는 환상이 인간이 갖는 모든 환상들의 중핵이라면, 이 작품들은 인간이라는 환상 혹은 세계라는 환상의 허망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단적으로 말해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는 전통적 진리와 그리 동떨어지지 않은 이 작품들의 탁월성은 인간과 세계라는 환상에 즉(卽)해서, 그 진리까지도 환상의 연장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진리의 환상과 환상의 진리, 달리 말해 인식의 허망함과 허망함의 인식이 다른 몸이 아님을 증언하는 데 있다. 상극하는 것들의 화해 혹은 상생하는 것들의 불화로 이루어진 그 몸의 자리를 밝히고, 스스로 그 몸으로 남는 것이 좋은 문학의 본성이라면 이 두 작품 속에서 분석되는 사랑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탐색하는 문학의 탁월한 길라잡이로 남을 것이다. 굳이 갈라서 이야기하자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사랑이라는 환상이 배태되는 과정과 그 요인들을 문제 삼는다면, <좁은 문>은 사랑이라는 환상이 유지되는 방식과 양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할 수 있다. 각 작품에 대한 세 편의 글들로 이루어진 이 책은 사랑이라는 환상의 배태 과정과 유지 방식이라는 하나의 시나리오로도 읽혀질 수 있을 것이며, 또 그러하기를 바라는 것이 저자의 숨길 수 없는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