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즐겨찾는 집이 있다. 나는 그 집을 '엘리제의 집'이라고 부른다.
세상에는 이제 없지만, 내 마음엔 여전히 있는 그 집을.....
처음 그 집을 발견한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그 집에 살고 있는 그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나는 언제나 그녀의 연주를, 저 가느다란 피아노 선율을 들을 수 있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그 집의 높은 창 아래 어둠 속에 서서, 그녀의 연주를 듣고 있는 젊은 나를 보곤 했다. 그 곁에 서 있는 세월처럼 외로워 보이는 내 모습과 함께.....
엘리제에게, 나에게, 그리고 소통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이 소설을 드린다.
어느 가을날 오후에 우연히 보았던 그 소방관을 생각한다. 그는 소방서 앞 작은 마당가 화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활짝 문이 열린 소방서 안팎이 어수선하고, 그이의 옷이 흠뻑 젖은 데다 얼굴도 땀으로 번들거렸던 걸로 보아, 화재 진압을 하고 돌아온 얼마 뒤였던 것 같다.
그는 노곤한 얼굴을 조금 쳐들고 파란 하늘을 보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편해 보였다. 순간, 뭔가가 와락 내 가슴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잠시 멈칫하고 지나쳐 가는 바람에 그 사람은 내 뒤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 얼굴의 풍경만은 나와 함께 계속 걸어갔고, 내 속 깊숙이 자리 잡았고, 이 소설 『불』로 자라났다……
여행이 끝나면 언제나 꼭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내가 끝낸 그 여행이, 무궁무진한 온갖 여로들 중의 단지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느낌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여행은 다 꼭 같다. 가능한 온갖 여로들 중에서 단 하나만 걸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역시 하나의 여행인 이 소설 『불』은, 순직한 소방관 아빠를 찾아가는 한 소년의 여로를 그린다. 그는 궁금해하고, 묻고, 찾고, 기뻐하고, 부딪치고, 두려워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여행을 완성한다.
물론, 소년의 여행도 온갖 가능한 여로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만의 여로이고, 바로 그 점이 진짜로 중요한 것이다……
2010년 어느 봄날,
옛 노래 ‘모닥불’을 들으며
이 작품은 죽음의 여정에 든 고령의 아버지와 동행하던 시절에 쓴 것이다. 아버지의 마지막 날들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시간의 열매인 성장, 즉 몰락과 죽음을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강한 연대가 있다. 더불어, 자기 몫의 삶을 마감해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던 나의 무의식이, 내 청춘(들)의 죽음을 뒤늦게 애도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웃기고 울적하고 신랄하게 연출한 심야 모노드라마를, 독자들은 각자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서 희극적으로도, 우울하게도, 힘겹게도, 통쾌하게도 읽게 될 텐데,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희극적으로, 우울하게, 힘겨워하면서, 통쾌하게 썼다. 지금 청춘인 모든 청춘들에게, 그리고 한때 청춘이었던 모든 청춘들에게 이 작품을 바친다.
소설가 F. B.가 만들어 낸 인물, 오스카 뒤프레슨은 자신이 부메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물론, 사람들이 그를 집어던지면 그는 그들을 향해 되돌아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는 내가 내는 책들이 부메랑이 되었으면 좋겠다. 당연히, 사람들이 내 책을 집어던지고 돌아서면 내 책은 즉각 그들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각설하고. 이 책은 10년 전부터 최근까지 틈틈이 써서 발표하거나 그냥 두었던 10여 편의 단편 중에서 9편을 묶은 것이다. 그냥 묶은 게 아니고 자신을 잡문 작가라 부르는 여행 전문 작가 이마립을 화자로 내세워 다시 썼다. 이 허구적 인물을 나의 또 다른 자아로 보아도 말리지 않겠다. 소재가 무엇이건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이야기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라는 뜻에서.
아무도 홀로 탱고를 출 수는 없다. 아니다. 아무도 함께 탱고를 출 수는 없다.
10대 때의 여름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어느 날 '요즘 내가 무얼 하고 있지?' 하고 살펴보니, 나는 밤마다 하늘의 별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무궁화와 석류나무가 있는 하숙집 툇마루에서였는데, 나는 밤마다 똑같은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깊이 전율하고 있었다.
끔찍하게 넓고 먼 우주라는 시공간과 나 사이에 견디기 어려운 틈이 벌어진 것이었다.
소설 <탱고>는 그 시절, 그 전율 혹은 그 틈에 기원하고 있다. 가없는 우주가 있고, 그 속에 전율스레 교차하는 시공간이 있고, 우리들이 떠돌이 소행성들처럼 살고 있고, 손쓸 수 없는 우연과 필연이 난무하는데, 저 두려운 카오스적 우주 안에서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의 의미, 그리고 그에 근거한 '이야기'가 들어설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나는 이 질문을 극히 통속적인 일상의 풍경들 속에 '슬쩍' 끼워보고 싶었다.
때로 빠르게 때로 느리게, 탱고처럼 직선과 곡선을 모두 활용하면서, 내 문장의 여백 저편, 당신의 머리 위에 침묵으로 펼쳐진 광대한 우주를 보아주기를 기대해본다. 특급열차의 창 밖 풍격을 대하듯이, 당신의 눈이 내 메마른 문장의 겉만 읽고 떠나버린다면, 오로지 직선으로만 달리다 가버린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당신과 나의 우주가, 그리고 나의 <탱고>가 얼마나 쓸쓸할 것인가.....
아무도 홀로 탱고를 출 수는 없다. 아니다. 아무도 함께 탱고를 출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