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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권영임

국적:아시아 > 대한민국

출생:1960년

최근작
2025년 3월 <전생에 나는 여시였다>

벌거벗은 공주님

숨길 수 없는 두려움을 가득 안은 채 또 한 권의 소설집을 세상으로 떠나보냅니다. 우리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글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쓴 작품들입니다. 굽이굽이 인생의 길목에서 만난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제 체험과 떼어놓을 수 없는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출구 없는 비정규직의 차별, 대기업 골드미스라는 허울 속에서 구조 조정에 시달리는 초라한 신분의 여성, 생계로 발목 잡혀 남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 빈곤한 가정의 자식,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자들의 추악한 행태, 쓸모 없어질 때까지 회사를 위해 몸 바쳐 일하다 소모품처럼 버려지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았습니다. 오래전에 쓴 작품들이긴 해도 당대의 상황들을 고스란히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크게 손보지 않았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약자들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작품을 다시 보면서 여성들은 차별이 아닌 생존을 말해야 할 만큼 오히려 더 열악해졌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잘못된 사회 시스템의 톱니바퀴 속에서 짓밟히고 부서지는 약자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더없이 좋겠다는 기대를 합니다. 사회적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을 통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인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담았습니다. 이십여 년의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죽을 만큼 힘들었을 때, 마흔 살 넘어 대학에 입학한 뒤,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책 속의 문장들을 읽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게 하루를 살아가는 데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했지요. 세상의 문장이 나를 일으켜 주었던 것처럼, 내 문장 하나가 우리 사회 약자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주는 공명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여 내 작품 속 등장 인물들에게 언제나 따스한 마음을 잃지 말라고 주문하곤 했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노려보는 쌍심지 - 내가 본 작가 권영임’ 발문을 써주신 김양호 교수님, 부족한 작품 하나하나에 온갖 철학적 의미를 부여해 그럴싸한 가치를 지닌 소설로 포장해 주신 김성옥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두 분 덕분에 두려움뿐이던 마음 안에 용기와 기대가 깃들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신들메를 조이고 나서렵니다.

전생에 나는 여시였다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고백을 해야겠어요. 어느 때부턴가 녀석들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사뿐히 내려앉는 동작이라든가 게으를만치 허리를 쭈욱 펴면서 하품하는 모습, 내 의도를 살피려고 평온하게 응시하는 시선 같은 게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누군가가 보지 않아도 자기 배설물을 땅에 묻는 우아한 청결의식도, 물론 천적에게 자취를 남기지 않으려는 본능이라고 들었지만, 내 관심을 이끌었어요. 아마 윤설이가 세상을 하직한 이후 생겨난 일인 듯합니다. 내가 참 좋아했던 후배… 나는 윤설이의 시와 문장, 타인들에게 좀처럼 자기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까칠한 성격까지 좋아하고 또 응원해 주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선택해 준 이들에게는 늘 한없이 너그러웠던 외우畏友. 말하자면 고양이를 좀 닮은 편이었죠. 그 애가 가고 한 달쯤이나 지났을까요? 산책을 나섰다가 어느 집 열린 대문 틈으로 고양이 가족이 마당 한구석에서 꼬물거리는 정경이 우연히 내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미 고양이 주위에는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새끼 고양이 몇 마리가 걸음마를 연습하고 있었죠. 내가 문틈으로 그걸 훔쳐보자 새끼 한 마리가 비틀비틀 내 앞으로 걸어왔습니다. 어미는 날카롭게 울면서 자기 새끼와 나에게 경고음을 보냈지만 내 주먹 크기만 한 새끼 고양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무릎 밑까지 다가오는 것이었어요. 아, 그 순간 이 아이는 혹시 윤설이가 환생한 존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어요. 나를 잘 따르던 개나 고양이를 대하면서도 이따금 그런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었죠. 인연은 운명이고, 운명은 또 다른 인연으로 연결되리라는 신념도 그 어린 날들 이후로 내 맘에 싹을 틔웠을 것입니다. 그러다 동물의 왕국 프로그램에서 우연히 여우를 보았습니다. 새끼 여우는 고양이와 무척 닮아서 구분이 되지 않더군요. 나는 일부러 전주동물원을 찾아갔습니다. 여우를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그러고는 그날 이후, 이 소설에 착수했습니다. 윤설이를 얘기하려는 마음이 커갈수록 윤설이가 등 뒤에서 내 발걸음을 안내하는 목소리를 더욱 크게 외치던 환청, 그게 한동안 들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소설은 단순한 윤회 혹은 환생을 넘어 인연 얘기까지 이어지게 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내 인연을 운명으로까지 이끌어 준 사람들이 어찌 윤설이뿐이겠어요?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모든 분의 이름과 얼굴이 폭풍처럼 이 순간에도 내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제 책을 펼친 독자 여러분과 저도 벌써 질긴 인연의 끈으로 엮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틀림없는 일이에요. 그게 어떤 인연일지는 좀 더 두고 보면 알 수 있을 테죠. 제 소설이 바로 그런 얘기랍니다.

키스하러 가자

슬픈 나라에서 산다는 것 가정 해체 위기에 놓인 아이들과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는 아이들을 다룬 프로를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다. ‘가출청소년’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세상 밖에 던져져 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 껌 씹고, 다리 떨고, 교복 줄여 입고, 원조교제를 하고……불량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비난한 ‘윤서’들에(「키스하러 가자」의 화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생계를 위해 위태롭게 살아가는 ‘윤서’와 같은 아이들이 더 이상 세상 밖으로 내쳐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부채의식으로 작품을 썼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단한 화자들에게 더 이상 절망하지 말자고, 어깨 다독이며, 나 또한 그들에게 위로받고 싶다는 따뜻한 말로 작가의 말을 끝맺고 싶었다. 하지만 창작집에 들어갈 원고를 다듬는 사이, 삼백여 명의 목숨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그 충격은 오래 갔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작가의 말을 쓰다 지우다 결국 세월호 얘기를 쓰지 않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박한 일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도 빼앗겼다. 지난 5월 여든두 살인 어머니의 생신을 그냥 넘겼다. 어머니는 여행을 좋아하지도, 갖고 싶은 것도 많지 않다. 자식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지내면 그것으로 족하신 분이다. 바라는 게 있다면 일 년에 한 번 당신의 생일에 자식들, 손녀들과 함께 야외에 나가 밥 한 끼 먹는 것을 기쁨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때같은 자식들을 수장 시키고, 아직도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가족들이 있는데 웃고 떠들고 생일 ‘밥’을 먹는 것이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닌 것 같다”며 조용히 넘어가자고 했다. 미역국도 먹지 않고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비겁하여 분노는 많으나 실천은 잘하지 못한다. 슬픔을 함께 나눴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유가족인 김영오 씨의 단식이 길어지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내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러고도 나는 밥을 먹고, 친구도 만나고, 영화도 보고, 여행을 다니며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다 김영호 씨가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보면서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에 걸쳐 단식을 했다. “내 딸은 나라를 위해서 밥을 굶는다는데 늙은 에미가 살겠다”고 밥을 먹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어머니는 하루에 한 끼만 드셨다. 보릿고개를 넘어온 어머니가 밥을 굶는다는 건 엄청난 큰일인 것이었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나는 이것으로 또 스스로를 위안했다. “내 가족이 왜 죽었는지, 왜 살아오지 못했는지 밝혀”달라고 찬이슬을 맞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여든두 살의 어머니는 그 법을 왜 만들지 못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수사권이니 기소권이니 법적인 것을 알 리 없는 어머니는 유가족이나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어머니의 또 다른 자식들과 손녀들을 위해서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눈앞에서 가족을 잃은 슬픔을 바로 당신의 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가족들을 사랑하고, 내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꽃과 나무, 산과 바다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래도록 이 땅에서 함께 살고 싶다. 내년 어머니 생신에는 가족들이 모여 마음껏 웃고 떠드는 기쁨을 선물해드리고 싶다. 295번째 황지연 양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는 뉴스를 접했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실종자가 아홉 명이나 있다. 산 자가 아닌 죽은 자를 기다리는 슬픈 나라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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