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이전엔 인생은 추억할 만한 영화처럼 느릿느릿, 선명하게 흘러갔다.
세상에 별 보탬도 안 되면서 세상을 두 어깨에 짊어지기라도 한 듯 인상을 쓰고 다니기도 했다. 실체가 이 할이면 환상은 팔 할쯤 되는 연애를 하다 그 환상에게 채여보기도 했다. 환상에게 얻어맞았다고 아픔이 덜한 건 아니었다.
봉인을 뜯고, 깊숙이 들어가고, 기어이 달콤한 맛 너머 쓴 맛을 보고, 돌아 나오는 길을 잃어버려 헤매는 청춘. 그 무모함에 넌더리를 낸 적도 있으나 이젠 모두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 되었다. 그것들마저 없었더라면 내 젊음이 얼마나 시시했을지 아찔한 걸 보면 난 오래 전에 어른이 돼버린 것 같다. 어린 왕자가 한심해하던 ‘진부한 어른’ 말이다.
성장 소설을 하나쯤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소녀가 아닌 소년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를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소설은 누군가에게 오십 마리의 비둘기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시작되었다. 그 많은 비둘기들이 식구처럼 살다 버려지고, 기어이 주인과 옛 친구들을 찾아 돌아오고, 소년과 한 시절을 보내다 떠나는 이야기……. 나는 무언가가 그렇듯 온전하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반해버렸다.
그 사람이 내게 그 이야기를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했을 땐 내가 자신의 ‘찬란한 유년의 왕국’을 복원시켜주길 기대했던 것 같다. 평소에 별로 해준 것이 없던 나도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소설이란 게 아무리 가벼운 척해도 좀 심각한 것이다 보니 결국 소년이 호되게 세상을 배워가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또 약속을 못 지켰다.
그뿐인가. 아이들이 자라기 전에 동화를 한 편씩 써주겠다고 했던 약속도 못 지켰다. 이 소설로 대신하기엔 아직 너무 어린 아이들이지만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그 애들에게 주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내 인생보다 너희의 꿈과 설렘, 짱구 머릿속의 귀여운 전략들을 훔쳐보는 게 훨씬 즐거워, 하고 고백하면서.
누군가는 욕망을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욕망이 있었다면 존재하는 건 날것의 욕망과 사랑에 감싸인 욕망뿐이라구요.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고, 욕망을 자신의 도구로 부리는 사랑과 욕망조차 잠재우는 사랑이 있을 뿐이라고. 저는 그 모순을 이 소설에서 탐사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는 욕망을 사랑의 씨앗이라고 말합니다. 태초에 욕망이 있었다면 존재하는 건 날것의 욕망과 사랑에 감싸인 욕망뿐이라구요.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이야기할지도 모릅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고, 욕망을 자신의 도구로 부리는 사랑과 욕망조차 잠재우는 사랑이 있을 뿐이라고. 저는 그 모순을 이 소설에서 탐사해보고 싶습니다.
한번도 소설이 내게로 온다는 느낌 같은 것은 가져보지 못했다. 내게 소설쓰기는 늘 산을 오르는 일과 비슷했다. 한발 한발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꼭대기에 서 있다고 느끼게 되는, 고통이 오묘하게 뒤섞인 그 노동의 매력에 내가 얼마쯤 중독되어 있다는 것도 부정하진 않겠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지만 시스템 속에서 엄마 노릇을 하는 건 쉽지 않다. 신혼과 두 아이의 육아가 겹쳐졌던 삼 년이 힘들었던 건 그것이 가부장제 시스템 속에서의 엄마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가 마흔아홉 가지로 세분화된다는 건 그만큼 엄마 역할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는 뜻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