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들꽃 무성하던 푸른 들판이 깎여 나가고 또 낮은 산들이 깎이고 잇다. 곧 대단지의 아파트가 들어설 모양이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가던 그 들꽃의 공간을 잃어버린 지 두어 달은 된다. 나는 이제 이곳의 집. 이 어둠과 밝음의 경계에 놓여 있는 집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어떤 집을 지을 것인가? 기쁨이나 환희에 가까운 슬픔의 집?
이 겨울 동백이 피고, 저 남쪽 바다는 더욱 따뜻하고 맑아지리라. 아이들의 깨끗한 눈빛 속 에 이 어둠 속에서 꺼낸 한 송이 붉은 꽃을 쥐어주며 나는 마음과 귀를 저 바다 쪽에 묶어 두게 되리라.
1994년 겨울
십수 년 저쪽의 무너지는 협곡과 일상의, 미래의, 피 묻은 붉은 협곡 사이를 잇는 다리를 놓으려고 늦은 새벽 등불을 켜곤 했다.
거미줄로 엮은 일야교(一夜橋), 아침이면 무너지고 없는 다리 아래로
그 잿빛 강물 위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오랫동안 숱한 사랑의 꽃다발을, 몸짓을, 문장을 보내주는 그대들께 눈짓 한번 제대로 주지 않았던 이 무정함.
다시 지어 입을 환희의 문장들, 채색 기둥 위에 빛나는 햇살과 고대 철학을 함께 공부하던 질풍노도의 빛나던 눈동자들, 그 눈부심이 없었다면 어두운 시의 자리로 돌아오기조차 어려웠으리라.
순정하고 아름다운, 그 소녀 소년들, 청년들께, 그대들께, 아침마다 다시 피어날 이슬 묻은 나팔꽃 다발을, 이 시집을, 드린다.
2022년 8월
잎사귀를 귀하게 여겨 줄기를 망치거나 혹은 소매를 깁기 위해 옷깃을 자르는 것과 같은 일을 되풀이한 것은 아닌지. 원효 스님 말씀이 오늘도 예리한 비수처럼 나를 치고 간다.
극도의 주의 집중은 망각이라 했던가...... 한족으로 극심하게 기울어져 있는 이 시편들은 무엇을 그토록 잊고 싶었던지. 아니 그것은 잊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리고 쉽사리 잊혀 갈 것들이었으므로, 한 편으로 의식을 몰아간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풍경의 배면에서 선혈로 나를 툭툭 치는 지난한 삶, 그 삶을 나는 또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그 지난함과 캄캄한 세월의 강을 건너온 연로하신 어머니께 이 작은 시집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