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속에 손을 넣어 지그시 움켜쥐는 감촉이 좋았다. 손가락 사이로 무성하게 흐른 알갱이들이 발치에 작고 엉성한 무덤을 만드는 일은 아름다웠다.
검은 타이어로 둘러싸인 씨름판 속이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스산한 운동장에 홀로 앉아 있었다. 수업에 늦은 교실로 돌아가는 길은 춥고 깊었다. 자리에 돌아와 짝을 쳐다본 순간, 소스라치던 그애의 표정을 기억한다.
더러운. 불쾌한. 가루져내리는. 벌레 같은.
나는 모래로 채워진 몸, 덩어리진 균이었을까. 초등학교 일학년 때의 일이다. 그 후로 학교를 세 번 옮겼고, 사람의 바깥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 늦가을 운동장에서, 누군가 한 명이라도 모래 속에 파묻힌 나에게 교실로 돌아가자고 말했다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라졌던 내 어깨를 아름답다 여긴다.
시를 쓰면서, 다시 사람 안으로 걸어들어가 그 빛으로 연명하는 법을 배웠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돌연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은 곁에 있음이 잠재된 홀로임을 믿는다. 우리는 타인 안에서 자신의 빛나는 지점을 찾기 위해 온생을 바친다. 그렇기에 나는 ‘아름다움’이 ‘아(我)다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어원을 믿는다. 나를 흡수하고 또 반사하며 빛을 보태준 인연들과 사랑하는 부모님, 부족한 첫시집을 믿고 힘을 쏟아주신 창비에 깊이 감사한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보이는, 운동장 구석 자기가 만든 모래무덤 안에 웅크리고 있던 작고 더러운 아이에게 이 시집을 건네주고 싶다. 거기 있어줘서 고맙다고, 오래 아(我)답자고.
2011년 9월 옥탑에서
음식을 내기 전 깨소금을 뿌리거나 지단 등의 고명을 올리는 것은 접시를 받는 이에게 ‘당신이 처음’임을 알리는 의미라고 합니다. 선물에 리본을 묶어 직접 풀어보도록 하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옥탑에 살게 된 것은 일종의 구원이었습니다. 문을 닫으면 홀로의 시간을 보호받고, 문을 열면 하늘을 향해 활짝 열리는 공간. 작은 방과 옥상을 오가며 화단을 가꾸고 요리를 배우고 시를 썼습니다. 사람들을 초대해 평상에 불을 밝히며 음식을 나누는 일의 기쁨을 알았습니다. 그건 다른 이를 맞아들이는 동시에 나를 내어주는 일이었어요. 식탁 앞에서 순식간에 환해지는 얼굴들을 보며 홀로 냄비를 휘저으며 보냈던 밤과 낮들이 사람을 향한 긴 부름이었음을, 리본처럼 예쁘게 매듭지어 건네고 싶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혼자 껴안고 있던 솥을 내려놓고 함께 마주할 식탁을 향해 걸어온 것 같아요. 요리를 통해 조금 더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주어진 순간들을 공들여 매만져 하나의 최선을 만들어내는 기쁨으로. 그래서 저에게 그릇에 음식을 담는 행위와 종이에 글씨를 올리는 일은 때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요리는 접시에 쓴 시, 시는 종이에 담아낸 요리 같습니다.
좋아해요, 말하고 싶은 순간마다 요리를 했습니다. 당신을 이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선언하는 마음으로 접시를 놓았습니다. 식탁에 마주 앉은 소중한 사람들이 있어 매 순간 행복하게 요리할 수 있었어요. 옥탑에 머물렀던 계절과 시간을 담아 보냅니다. 이 고백이 당신에게 무사히 가닿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