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신과 타인의 부재를 존재의 상태로 전환시키는 연인의 형상을 꿈꾼다. 나 역시도 이런 사랑의 자장에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이 얼마나 천문학적 넓이의 규모를 가지는 아리땁되 ……무섭고 슬픈 말인가. 사랑의 ……존재.
나는 이제 만인에게 사랑받는 연인을 원하지 않는다. 상처만이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한 방식이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큰 사랑을 품은 사람은 점차 작은 사랑이 아닌 곳에, 그리고 사랑의 일부는 더더욱 아닌 곳에 살게 되며, 이것이 나로선 매우 견디기 어렵고…… 그러함으로 너무 큰 것 안에는 정작 사소하고 작은 사랑의 일이 설자리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옳게 알고 있는가. 혼돈스런 사랑의 본성에 대해 단언할 권리도 정녕 있는 것인가.
소유했던 오랜 서적을 처분하고 생일날 이사를 했다. 시도. 그 곁의 섬에 산다. 그럼에도 바다로 나가지 않고 있다. 여기를 떠나기 전, 하루면 족하다고. 그날은 조밀하고 간격 좁은 물길 아닌 가닥수를 변형시켜 직조한 너른 바닷길, 나의 지형학적 바다를 보겠다고. 반짝대는 환영의 영상을 기어코 분에 넘치게 담겠다며 그날을 기다린다. 아직은 쓸쓸한 바닷길, 하늘길이다. 낯섦으로 뒤바뀐 밤낮이 오간다.
격앙된 숨결로 말하는, 권리. 그것의 삶을 붙잡다. 머묾과 떠남에 존재하는 초점 같은 순간과 지나침. 쌓이면서 함축되는 생. 연명한다는 것. 오히려 그리하여 눈부신 생애. 나의 생에 정면승부를 건다. “인생도 사랑도 제가 책임져요. 일도 찾고 공부도 하겠어요……!!” 이 말은 ‘그녀’(Die Fremde, 2010)에게서 주워섬긴 말이지만, 쓰는 순간 그 결정은 내 결심으로 자리하였다. 인습과 기성화된 현실이라는 지배 체제 그 거대한 괴물 앞에 선 이방인, 나의 우마이. 그녀가 떠날 때다. 노예의 금기를 범하듯 생각보다 위험한 양극단의 가능성 위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 때로 무지한 듯 막막함이 밀려든다. 아르테미스와 아테나 사이, 비추는 것이 저 스스로 발광체라는 이성이 되어야 한다. 극명한 용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섬김이 섬광이 되는 그런 변이의 과정으로 끝남으로써……
네가 내 시를 받아볼 그즈음 네가 알던 곳은 말소된 장소일 것이다. 한동안 고스란히 바닷가 폭설에 갇혀 겨울을 날 것이다. 섬에서 근린의 뭍으로 가기 전. 그렇게 바람, 구름, 나의 시도. 그마저도. 그 무엇에 비길 만한 것이 없는 사랑도 미완인 채 아직은 비켜섬으로 간다.
어느 날 시간이 호된 질책처럼 나에게 한데 임박했고, 여지없이 사랑을 잃은 인생으로 내몰았듯이 다신 못 가볼 그 길을 불현 무상으로 돌려주려는 생, 그 둥ㅤㄱㅡㄻ의 형상들. 이젠 개인적 부채였던 몇몇 그녀와 그의 이야기를 돌려드린다.
지순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대체 어딨는 거냐, 함부로 부정하며 나를 단념에 포함시킬수록 불가능한 영원과 불가피한 사랑의 형상에 대해 쓰고 싶었음을. 현재 사랑에 대한 좌절과 우수로 심하게 손상되었음에도 사랑과의 다툼에선 여전히 역부족임을 느끼며 바다로 흘러가는 큰 배들을 날마다 바라본다. 그렇게 떠나고 머묾에 존재하는 영혼들. 조용히 자신을 드러내는 흰 것들. 황해로 뻗어가는 물길이 전신으로 파문진다.
두 발로 설 수 있는 곳의 끝. 땅끝이다. 끝…… 이유 없이 찾아오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지만, 끝은 언제나 그렇듯이 조건짓고 이유를 동반한다. 그럼에도 공간의 차별성이 무화된 상태로 늘 가까이 있는 섬광—신성한 눈부심이 오늘도 표나게 두드러진다.
차례에 있어 맨 끝인 꼴찌인 양 일부러 표현에 지각인, 내 생에 호흡을 맞춰준 당신께. 내가 사라져도 영속성으로 살아 있을 섬, 격랑으로 부서진 사랑에 머물러 쓴다.
용서해달라. 모든 사건이 시작된 시간이자 끝인 공간에서 하양을 보며 내가 잊겠다. 섬약하고 고결한 흐름.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고 싶었고.
문학은 내 사랑의 직무였다. 나는. 있겠다.
책이 나오기까지 맘 써주신 선생님들께 그리고 나의 언니와 동생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애닯던 그해 늦여름 먼저 씀
내게 메두사(Medusa)라는 신화적 인물은 오래되고 낡은 인식으로 자리했다. 익히 알듯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마녀)로 스테노, 에우뤼알레, 메두사라는 고르고네스 세 자매 가운데 하나인 메두사였다. 좀 더 다른 인식이라면, 원래는 괴물이 아니라 해신 포세이돈과 정을 통한 일로 인하여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괴물로 변했다는 이야기 정도. 그렇기에 신화에 대한 초점은 복수(複數)의 실뱀 머리를 한 괴물의 만행으로, 그녀의 얼굴은 보기만 해도 돌로 변해 버린다는 이야기로 머릿속에서 굳어 버렸다. 불사신인 메두사는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은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려 죽음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마치 타율적인 사고처럼 영웅 서사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다. 그런데 자의든 타의든 창의적 상상력은 이탈해 버린, 상황 종결 상태, 그렇게 끝이었을까.
결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살아가면서 메두사는 불현듯이 휘감아 오곤 했는데, 숫제 표면화된 서사를 걷어 낸 다른 차원의 상징과 해석이 드러났다. 메두사로부터 시선을 돌린 채 청동 방패를 응시하며 거기에 비친 메두사의 모습을 보고 그녀의 머리를 베는, 페르세우스의 용맹을 벗어나 내재하고 있는 의미 차원으로 들어가면, 궁극적으로 그들의 보는 행위는 예술적 참여로 설명되었다. 일찍이 문광훈 교수는 페르세우스의 방패와 관련하여, “간접적 형상화 방식”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페르세우스의 방패], 2012), 나의 모색과 고민이 다다른 지점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예술 작업이란 단순히 메시지를 전달하는 차원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매개되는 차원의 우회적 창출 행위라는 것이다. 당연히 페르세우스의 방패는 메시지를 단순히 전달하는 차원의 선동적 활동을 거부하면서 또한 괴물로 대변되는 폭력의 이미지를 간접적 형상화 방식으로 보게 하는 예술 창작의 핵심 원리와 깊게 연관되었다.
재차 언급하자면, 메두사를 직접적으로 보지 못하는 페르세우스는 청동 방패를 거울 삼아 메두사를 바라보며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내게는 거울상이 메두사의 모습을 파악한다는 사항보다는 형상을 비춘다는 의미에 상응했다. 이때의 거울상이 반사와 반영(reflection)을 뜻하는 시각적 요소와 긴밀히 관련된 그것의 확대된 모델로 지각되었다. 예술적 반영으로 말미암아 예술에 대한 반성은 성립되기에 이른다. 스스로 부여한 자기 기율로서의 반성은 불교에서 일컫는 회광반조(回光返照)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는 것이 내면을 비추는 반영으로서의 반성에 다름 아닌 까닭이다. 다소 변형시켰을지언정, 내게는 신화적 맥락의 운명적 사건 중심이 아니라, 거기에 내재한 예술적 참여의 보는 의미가 크게 다가왔다. 메두사 이야기는 이렇듯 겉면에 드러난 신화의 줄거리를 공공연하게 배제하고 나름의 깨침으로 새로운 예술적 의미에 상응하여 싹터 나오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현대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예술적 존재가 더는 명석판명하게 드러나는 동일성을 담보하지 않고, 드높일 궁극의 진리가 존재하기 어렵다는 걸 실감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애정은 강밀도를 보이며 지속되었다. 현대적 변화와 변동을 체감하면서도, 자본주의라는 생산양식에 날로 침식해 들어가는 예술로 실망과 좌절이 동반되면서도, 모순형용의 모습처럼 그럴수록, 아니 그러한 이유로 필사적인 반응으로 예술은 내게 자리하였다. 제임슨 프레데릭의 통찰을 빌리자면, 생산양식에 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문화와 예술은 꿈꾸기를 수행한다고 하였는데, 때때로 그 실천적 능력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자본주의 모순의 산물인 예술품이 스스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는 상징적 행위를 드러낸다고 하면, 그것은 상술한 간접적 형상화 방식으로서의 청동 방패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는 걸 넌지시 일러 주는 것이자 동시에 자본주의의 식민화된 무의식을 허무는 예술적 역할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예술은 저항의 미학적 실천과도 같이 인식되면서, 한편 자주 드리우는 의구심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현대 예술로 머릿속에서 양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