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쓰는 사람이 무슨 소설이냐? 한 우물만 파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대놓고 나무라는 이들이 여럿인데 속으로 비웃는 이들은 더 많을 것이다. 명천 선생께서도 대놓고 말하신 이 중 한 분이셨으니, 지금이라도 명천께 반항하고 싶다. 선생님께선 그 많은 소설을 쓰시는 중에도 동시뿐만 아니라 희곡, 산문을 쓰시고 왜 제게만? 한 우물만 파기에도 매우 부족한 재주를 보셨고, 감당하지 못할 체력이 염려스러우셨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을 써서 신춘문예에 응모한 적이 있다. 2001년 1월 1일자 신문에 발표하는 신춘문예였다. 세 편을 써서 한 편씩 세 신문사로 보냈다. 그중에 동아일보로 보낸 「거꾸로 흐르는 강」이 최종심에 올랐었다. 그때도 명천께 꾸중만 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 쓰지 않았다. (중략)
머구리를 했던 ‘건준’ 같은 인물 말고도 우리 사회엔 무거리의 사연이 많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유령 마을이 되어 가는 농촌 마을의 노령 세대들이 무거리라 할 수 있다. 식민지와 전쟁의 상처로 가난했던 세대들, 마른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고생하며 가난을 극복해 낸 세대들, 이젠 소외되어 사라져 가는 세대들이 사회의 무거리 아니고 무엇일까?
이처럼 여러 분야 여러 계층에 각각 다르고 다양한 무거리들이 있다. 이 소설집이 그 무거리 이야기를 전하려는 뜻으로 쓴 것은 아니다. 다만 무거리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열리는 데 작은 일깨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을 조금 넣었을 뿐이다.
아름다움이란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입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 돌아갈 수 없는 그때를 그리는 마음입니다.”
“겨우내 언 땅에서도 시들지 않고 꾹꾹 짓밟힌 후에 더 여물어지는 보리처럼, 아프고 고단한 우리네 삶의 여정에서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는 데 이 책의 이야기가 쓸모 있어지길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