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혁명을 꿈꾼다. 젊어서라거나 지나치게 철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내 혁명은 바깥이 아니라 안을 대상으로 하니까. 언제나 나를 전복시키는 게 유일한 목표니까.
그래서 나는 요즈음 무관심을 연습하고 있다. 나를 덜 보고 덜 찾고 덜 만지려 한다. 나를 즐거이 배반하는 과잉이 아니라 나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과잉으로부터는 건강한 열매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사실 ‘우리’의 인드라망에 이미 연루된 ‘나’를 따로 떼어내기란 어렵다. ‘고독은 타자를 함축하는 사건’이라는 메를로 퐁티의 말처럼, 고독조차 타인 없이는 불가능하니 말이다. 게다가 어떤 특수한 오해는 어떤 보편적인 이해를 위해 필수불가결하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를 배제한 우리는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무관심하면, 의도적으로 나를 외면하면 우리를 위한 공간이 분명 더 생기리라 믿는다. 나를 포함한 우리이니만큼 별반 손해 볼 것도 없다. 그래서 계속 무관심을 연습할 생각이다. 사소한 나, 나, 나를 잠시만 묶어두면 더 큰 나, 자유로운 나, 혁명에 성공한 나를 만날 수 있으리라.
너무 오랫동안 내보내지 못하고, 놓아버리지 못하고, 쉽게 포기하지도 못한 채 끙끙대며 움켜쥐고 있었나봅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보냈음에도, 잊어야 할 것들을 잊지도 못하고 알아야 할 것들을 다 이해하지도 못한 채 여전히 많은 것들을 그러쥐고만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른바 ‘등단’이라는 통과의례를 치른 뒤 12년 만에 처음 ‘소설집’이라는 것을 내면서 뿌듯함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고, 포만감이 들기보다는 허기가 지는 이유입니다. 절세의 미인이 되는 것보다도,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는 것보다도 더 되고 싶었던 것이 ‘작가’인 저였는데, 어찌해서 그 걸음이 이렇게나 더디고 어눌한지 모르겠습니다.
2편의 단편을 내보인 것으로 등단 후 10년이 지나도록 제가 한 것이라곤 ‘쓰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최근 2년 동안, 몇 편의 글들이 제게서 걸어나가 가당찮지만 당위를 부르짖었고, 그래서 저는 지금, 조금은 안도의 숨을 쉬고 있습니다.
어떤 작가의 글도 그러하겠지만, 글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작가인 저 자신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때로 외곬 같기도 하고 저열하기도 하며 산만하기도 한 인물들의 모습이 결국은 저 자신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차 마시는 시간을 위하여>와 <일광 교향곡>은 12년 전에, 나머지 소설은 최근에 쓴 것이지만, 공통으로 녹아 있는 인물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 인간의 성정(性情)들을 저는 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싫어하는 것을 묵과하지도, 용서해야 할 것을 포용하지도 못하는 저이기에 소심하지만 집요하게 저항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둘투둘하기도 하고 쭈뼛거리기도 하는 제 글들이 저는, 저는 참 가엾습니다.
아직도 불평이 많은 저는 아마 앞으로도 한참을 더 고뇌에 싸여 있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를 닮아 가스러지고 찜부럭 부리는 글들이지만 마침내 뿌연 창을 열고, 미약하나마 숨을 쉬게 되어 다행입니다.
세상이 물리법칙이나 신의 뜻에 의해 굴러가기보다 이야기에 의해 굴러간다고 믿는 편이다. 화가나 음악가가 그림이나 음악을 세상의 정수요 영혼이라 여기기도 하는 것처럼 소설가인 나는 이야기 추종자다. 탄성을 지닌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종횡무진, 자유로운 우주 삼라만상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리라 여긴다. 다소 편협한 내 믿음이 어떤 근거로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하나, 이야기가 내 삶의 알토란 같은 핵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원고를 갈무리하면서 카프카의 소설 「단식 광대」가 떠올랐다. 단식 광대만큼의 명성을 얻은 적도 없거니와 감히 그처럼 절절하다고도 말할 수 없으나 오롯이 공감하는 한 구절이 있다. “왜냐하면 저는 단식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렇게밖에는 달리 하는 수가 없습니다.”
정말이지 소설을 쓰지 않고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다.
보지 않아도 내 볼이 발그레한 걸 알겠다. 나를 사로잡은 게 하필 이야기여서, 사로잡힌 게 하필 나여서 감사할 따름이다.
성경에 나오는 유다에 대한 보르헤스의 파격적인 해석은 “그(예수)가 치른 희생을 한 오후에 겪은 십자가의 고통에 한정시키는 것은 신성모독에 해당된다.”는 문장으로 대변된다. 즉 보르헤스는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완전히, 영원히 멸시를 받는 존재여야 한다면, 그는 예수가 아니라 예수의 이름 뒤에 숨어 있는 유다여야 한다고 본 것이다. 물론 소설이다. 그런데 나는 늘 이런 소설만이 재미있었다. 누구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어떤 관점, 혹은 드러난 사건의 전혀 다른 이면을 슬그머니 내비치곤 하는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내 삶은 지금보다 훨씬 초라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살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온기를 던져주었던 우직한 대통령이 우리 곁을 떠난 후, 어이없는 두 정권을 경험하면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지 않을 수 없었기에, 내가 이야기에 다가가는 속도보다 이야기가 내게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인간으로서, 작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이희락의 진심과 씨름하는 것이었다. 이희락은 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누군가이고, 동시에 나 자신이다. 나는 인간에 대해, 인간의 영혼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했다.
흔히 우리가 진심이라 부르는 것이 어떤 형태를 갖고 있는지, 동시에 얼마나 다른 형태로 바뀔 수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광장에 나간 사람이든 나가지 않은 사람이든, 또 촛불을 들었든 태극기를 들었든 모두가 진심이라 얘기하고 있었으니까. 사투의 시간이었다. 안다리, 바깥다리, 잡채기 등 온갖 기술을 동원해도 이희락의 진심과 나의 씨름은 결론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기기 위해 누군가의 진심과 맞붙은 게 아니었다. 나는 결론이나 해답 등이 오히려 불필요한 부유물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진심에는 진심 아닌 것이 반드시 내포되어 있다. 마치 전지전능한 신이 불완전함과 무능함을 갖고 있지 않다면 결코 완전하지 않은 것처럼. 희망은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없어야 희망이라지 않는가! 사랑하는 모든 이유들을 열거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지 않는가! ‘보고 싶다’는 말에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이 이미, 항상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진심과 진심 아닌 것의 간극 자체가 진심에 내재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어쩌면, 진심입니다』는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랑 이야기도 아니고, 배꼽 빠지게 하는 우스운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나 하필, 인간의 진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기꺼이, 즐겁게, 씨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살고 있는 ‘아일랜드’라는 나라는 걱정을 무색하게 할 만큼 튼튼한 감옥이었다. 그러니까 이곳은 사방이 바다인 섬, 온전한 단절의 장소였기에 포기로 인해 저절로, 또 비교적 수월하게─‘성숙하게’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감내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감히 내가 희망 하나 없는 철저한 절망 가운데 자유로워졌노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조금은 편안해졌다고, 조금쯤 무감해지기는 했다─아마 감각을 둔화시키는 이런저런 보조제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가까운 이들에게 한국이 그립다거나 상황이 힘들다고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나는 점차 ‘어찌할 수 없음’에 순응해갔다.
그동안 사람이 아니지만 간간이 내게 위로를 던졌던 것은 조나단 스위프트가 보았을 법한 거대한 바위와 대양이었고, 오스카 와일드가 즐겨 칭송했을 분홍빛·보랏빛의 꽃들이었으며, 또한 제임스 조이스가 악몽의 검은 범을 만났다는 마텔로 타워 등이었다. 그리고 까마귀, 까치, 참새, 오리, 백조, 다람쥐, 고양이, 개, 여우 들…. (그중 가장 빈번하게 나를 찾아준 여우에게, 또 감동을 주었던 녀석의 새끼들에게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어느 누구의 배려도 간섭도 허락하지 않은 채 제 갈 길을 가는 바람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을 쓰면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내가 즐거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 자신이 만족하기 위해 ‘새로움’은 필수였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나는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자주 주문한다. 검증된 것들이 주는 맛깔스러움보다 겪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는 게 더 큰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은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영상 매체로 접했을 때 더 나은 이야기가 있다면, 왜 굳이 힘들여 책을 읽겠는가? 나는 밑줄 그어가며, 곱씹어가며, 공들여 읽을 수 있는 책을 좋아한다.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트럼 샌디>에 나오는 토비 삼촌처럼, 나 역시 ‘나의 목마’를 탈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세 번째 여름을 맞고 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만약 이 부분이 부럽다면,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심심해서,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동시에 떠나보내기 위해서, 무엇보다 살기 위해서 나는 읽고, 쓰고, 꿈꾸는 일들을 그치지 않았다. 따귀를 낳았고, 불안을 낳았고, 바람을 낳았고, …낳고,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