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은 자유인, 자연인으로 돌아오는 것이 최상의 목표였다. ..개미(음식의 깊은 맛0가 쏠쏠한 삶, 그늘이 두터운 삶, 떡목이 아닌 수리성으로서의 소리와 가락(남성적), 그것이 눙치는 시김새(발효)의 가락이 남도풍이 아니던가? 뻘물이 튀지 않은 삶은 또 얼마나 싱거운 것이던가? 그래서 요즘 더 정확히 말하면 <남도의 맛과 멋>을 내고 변산 시대의 뻘을 파는 작품들로부터 시작해서 내 시엔 비로소 대와 황토와 뻘맛이 밴 음식들이 끼여듦도 이 때문이다.
현대회화에서 처음으로 선(線)을 의식한 아티스트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로드첸코였다. 그는 새채 회화의 마지노선도 이 선(線)을 통해 초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훈더트 바서는 "기능주의야말로 범죄며 직선은 선과 도덕에 대한 부정"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그의 선언대로라면 '곡선의 상법(想法)' 이야말로 웽빙의 선이며 생체리듬의 선이다. 여기에 비로소 소리가 숨쉬고 가락이 있다. 이 가락은 느림으로 가는 삶이다.
시로 보면 서정의 운율이며 음악으로 보면 선율이다. 건축으로 보면 시간과 공간이 머물 수 있는 선조주의(線造主義) 공법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는 대개 이 '곡선의 상법'에서 솟아난다. 나는 이 상법에서 나오는 체험의 소리 50여 편을 모아 <소리, 가락을 품다>로 엮는다. 이는 내 詩 쓰기의 코드요 노자가 말한 '곡즉전(曲卽全)', 즉 '곡선은 완전하다.'로서 내 삶의 자전적 길이기 때문이다.
곰처럼 황토흙을 뭉개고
어차피 잘 써보라는 채찍인 줄 알지만 그렇더라도 뱁새가 어찌 황새걸음을 걸을 수 있을 것 인가. 이 순간만은 차라리 '소월'이란 이름자를 떼어 버리고 싶다. 첫 등단 소감을 쓸 때는 "곰처럼 황토흙을 뭉개고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했는데 이 소감에서는 붓을 들기가 이리 부끄럽다.
유상대(流觴臺)는 곧 최치원이 놀았던 풍류현장이다....최치원이 말한 현묘한 도리, 그리고 유오산천(遊娛山川), 무소무원부지(無所無遠不至)의 화랑들이 누볐던 그 기개와 풍류정신이야말로 오늘의 국토관과 생명을 살리는 처방전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검약과 절제의 선풍으로 이해되는 남도풍류의 맥을 누군가의 손에 의해서 정립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이 책을 서둘러 세상에 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