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유머는 특정한 대상을 조소하거나 야유하는 데 주력하는 기지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머는 슬픔을 경시하거나 고통의 하중을 외면하지 않는다. 우는 자를 못 본 체하지 않는다. 유머는 일종의 마음가짐, 말하자면 너와 나를 괴롭게 하는 그게 실은 별 게 아니야, 라고 속삭이며 위무하려고 애쓰는 마음가짐이다. 너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 당연히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다. 다만 내가 생각하는 유머는 고통에 너와 나의 몸과 마음 대부분을 밀어 넣고 그것의 자양분으로 삼거나 그런 삶에 은밀하게 안주하려는 태도와 결별하려는 몸짓이다. 그것은 나를 또 다른 나로 객관화해 바라보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다. - <후기>에서
“내게 젊음이란 한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햇빛과 물결이 부딪혀 일으키는 ‘빛나는 정지(靜止)’(이성복, <상류로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 떼처럼>)를 이루기 직전의 격렬한 몸부림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젊음이 이러한 찬란한 이미지만 갖고 있지는 않다. 나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면서 백 년에 이르는 한국문학사를 일별하면서 무수한 젊음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식민지와 분단, 전쟁, 혁명과 독재 등을 거쳐 온 한국 젊은이들의 경험이 그 부침과 격변의 강도와 깊이에서 특별하고 남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폭(自爆)하는 속물>이라는 독특한 제목은 책에도 등장하는 시인 김수영의 에세이 <이 거룩한 속물들>(1967)에 나오는 표현이다. ‘자폭하는 속물’은 시인 김수영이 1960년대 한국사회를 속물사회로 명명하고 그 누구도 속물됨으로부터 자유로이 빠져나올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격렬한 몸부림을 표현한 구절이다. 자신의 소시민성, 속물근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의 대가였던 김수영의 고뇌를 담은 ‘자폭하는 속물’은 개발독재의 속물화된 사회에 의해 일방적인 성장을 강요받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던 1960년대 젊음의 고뇌와 치기, 환상과 환멸, 자학과 자기도취를 압축하는 특별한 어휘라고 생각했다.”
2019년이 한국 SF 역사에서 뜻깊은 해라는 것은 한국문학의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수많은 SF 작품이 출간되었으며, 드물게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학술 대회와 강좌 등이 열렸으며, 한국 SF가 해외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었다. SF 전문 출판사들이 생겨났으며, 각종 SF 공모전이 생겨났다. 문예지는 SF를 비중 있게 다루기 시작했으며, 학술지는 동시대의 한국 SF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런데 SF에 등장하는 특정한 미래 시점을 의미심장하게 취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조지 오웰의 『1984』(1948)에서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가 도래하는 1984년, 1984년에 개봉된 <터미네이터> 1에서 인공지능 스카이넷이 인류에게 핵전쟁을 벌이는 1997년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1982; 1993)의 2019년 등등. 나는 <블레이드 러너>에 그려진 미래가 앞으로 2019년이 되면 정말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영화를 처음 보던 1993년 스무 살 무렵에 생각했다. 인간과 대화를 하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플라잉카가 하늘을 날고, 감성과 지성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안드로이드가 만들어질 거라고. 물론 SF를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고 나서야 SF는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미래를 상상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책머리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