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더 큰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벽입니다. 이 벽은 마음의 벽이라 할 수 있지요. 이 벽은 정말 없으면 좋겠습니다. 요즈음 초등학교에서도 친구를 따돌리는 일들이 있다고 합니다. 친구를 따돌리는 어린이들은 자기 마음에 높은 벽을 쌓는 것입니다. 친구를 따돌리려고 쌓은 그 벽 때문에 결국은 자기가 숨이 막히고 맙니다. 탁 트이고 열린 마음이야말로 건강한 마음이니까요.
마음의 벽을 헐어 버리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동화는 그런 용기를 내는 한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 150여 년 전,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대단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혁명적인 생각과 운동을 동학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동학은, 물질을 좇다가 사람들의 생명마저 가볍게 여기게 된 현재의 우리 사회가 깊이 되새겨 봐야 할 소중한 교훈을 남긴 것이지요.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던 그 엄청난 생각은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꿈을 잃어 가는 것, 우리 사회의 진정한 문제는 이것이 아닐까? 물질적인 욕망에 허덕이며 자신의 이익에 몰두하는 개인들, 이런 개인들이 만드는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마치 맹수가 득실거리는 정글과 같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스로 행복하고 더불어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꿈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소유의 욕망에 휘둘리며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잃어버려서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개인과 사회가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일까?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우리 청소년 독자 여러분들과 더불어서 우리의 꿈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고 우리가 함께 꿈꾸고 가꾸어야 할 이상과 소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아름다운 꿈을 함께 그려 보고 싶었다.
우리 사회는 불행한 우리의 아이들을 제대로 감싸안지 못하고 있고, 그런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 동생>에서 나는 입양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모습을 솔직하게 바라보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살아도 남의 불행을 모른 체한다면 얼마나 보기 싫은 모습인가?'
'그런데 불행한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데 어렵게 하는 마음의 벽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그 벽을 깨뜨릴 수 있을까?'
어린이 여러분도 이 동화를 읽으면서 그런 문제들을 함께 느끼고 생각하면 좋겠다는 바램입니다. 우리 모두 생각하고 노력할 때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가 낳지 않은 아이를 훌륭하게 키우는 사람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서 환하게 우리 사회를 밝힐 거라는 희망 말입니다.
달리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 눈가리개는 앞만 보고 질주할 수 있도록 채워진 것이다. 그 말은 목표 지점을 향해 가장 빠르게 효율적으로 달릴 수 있을 것이다. 오직 정면만 보고 달리고 달릴 테니까.
그 말은 직선으로 뻗은 앞길만 볼 수 있다.
양쪽에 펼쳐져 있는 들판과 숲은 볼 수 없다. 물론 하늘도 땅도 볼 수 없다. 따라서 들판에 피어 있는 풀과 꽃, 숲의 나무, 푸른 하늘의 구름을 볼 수 없다. 땅의 뭇 생명도 볼 수 없다. 볼 수 없으니 느낄 수 없고, 생각도 할 수 없다.
‘작가의 말’을 쓰려고 할 때, 눈가리개를 한 채 달리는 말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이 ‘불행한 말’의 이미지에 우리 청소년들의 모습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지우고 싶지만, 지울 수 없는 뚜렷한 형상으로.
점수와 대입이라는 ‘절대’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달려야만 하는 모습들. 잠시라도 한눈을 팔 수 없게 집과 학교, 학원에서 온갖 종류의 채찍질을 당하는 모습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하여 보고 느끼고 생각할 틈이나 여유조차 없는, 저 숨 막히는 질주의 모습들.
그래서 우리 청소년들은 의문을 갖는 것도 질문을 하는 것도 쉽지 않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와 사회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우리가 만나야 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그 삶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자연과 인간, 세계와 사회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배움의 길은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고 의미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을 하지 못하는, 하지 않는 삶은 결국 빈약하게 쪼그라들고 말 것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우리 교육의 현실과 청소년들의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고 너무도 가슴 아프다.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이 의미 있는 질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우리 청소년들이 좀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나마 숨을 고르면서 느끼고 생각하고, 그래서 이런저런 문제들에 의문을 갖고 질문을 하는 작은 계기라도 되면 좋겠다고.’
그런 작품들이 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 여러분의 몫이다. 다만, 작가로서는, 이 소설들이 독자 여러분과 서로 마주 보기를 바랄 뿐이다.
이 소설집이 나오기까지 적절한 조언을 주신 최시한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꼼꼼하게 원고를 다듬어준 문지 편집부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잘 노는 행복한 삶을 위하여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사랑하여 한국 여성과 결혼하고 우리나라에서 살고 있는 어느 독일인이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읽은 적이 있습니다.
“물론 장점이 많지만…… 한국인들의 가장 큰 문제는 놀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획일적인 경쟁만 강요하는 교육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놀 줄을 모르면 삶을 제대로 즐길 줄도, 행복한 삶을 누릴 줄도 모르게 된다고 덧붙였습니다. 그 지적에 고개를 크게 끄덕일 수밖에 없더군요.
우리 청소년들의 현실이야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이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태라 하겠지요. 그러나 이런 현실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해 봅니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 스스로 틈을 만들고 기회를 마련하여 즐기고 노는 방법을 배워 나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희곡과 그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은, 원래 ‘놀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말 놀이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Play의 뜻 중에 명사로는 ‘희곡’이 있고, 동사로는 ‘(연극을) 상연하다’라는 풀이가 있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지요.
문학 작품인 희곡은 여백이 많습니다. 이 비어 있는 곳은 무대에서 상연될 때, 연출과 연기에 의해 채워져서 관객에게 보이게 되지요. 따라서 희곡을 읽는 일은, 독자 스스로 연출가와 배우가 되어 상상으로 무대를 만드는 작업과 같은 것입니다. 희곡 읽기는 이런 창조적인 상상 속에서 즐기고 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곡 읽기는, 처음에는 상당히 낯설겠지만, 조금만 노력하면 스스로 여백을 채우면서 노는 즐거운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희곡으로 즐거운 ‘상상 놀이’를 한 다음, 그 희곡을 연극으로 만들어 볼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요. 그런 기회를 가질 수만 있다면, 정말 몸과 마음으로 노는 법을 배울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청소년 소설은 꽤 많이 출간되었지만, 청소년 시집은 희소하고, 청소년 희곡집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편식이 좋지 않듯이, 문학 작품의 독서도 지나치게 편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지요. 그런 점에서, 균형 있는 시각으로 청소년 희곡집을 기획하고 출간하는 과감한 시도를 해 준 우리같이에 고마움을 전합니다.
부디 이 희곡집이 우리 청소년들에게 의미 있는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져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