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 아이들의 약전으로 쓰고 이 소설의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결코 끝낼 수 없을 것 같았던 소설을 쓸 수 있었다.
아이는 언제나 늦은 밤에 내 방으로 찾아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내 등 뒤에 서 있다가 돌아갈 때도 있었다.
아이가 들려준 말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종일 책상에 앉아 문장을 썼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문장을 쓰는 것이었다.
장편소설을 퇴고하는 중에 단편소설 <유채>를 썼다. 아직 유채꽃이 피지 않은 섬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 아이의 이야기였다.
보태고 덜어내는 과정이 길었다. 여러 해의 시간이 지나갔다.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아이는 내 곁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아이는 떠났고 나는 혼자 앉아 있다.
아이가 호명했던 다른 아이들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이제 나는 어떤 언어로 글을 써야 하는지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일은 무거운 짐을 부려 놓고자 하는 욕망이었다. 삶이 만족스럽다고 느껴질 때 나는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했다. 노래를 잘 불렀거나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다면 소설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를 졸라 샀던 스피드 스케이트는 빙판 위를 달리는 즐거움보다는 발목을 죄는 아픔을 주었고,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농구 선수가 될 수는 없었다.
한밤중이나 새벽,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창에 비친 얼굴을 보게 될 때, 긴 시간 의자에 앉아 있던 탓에 마치 남의 몸에 들어간 듯 불편하게 걸음을 뗄 때, 소설이 결코 나를 가볍게 해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낭만적인 사랑을 꿈꾸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쓰엉의 삶을 좇으면서 나는 저물기 시작하는 해를 바라보고 서서 초록색 파프리카를 깨물어 먹었던 츄옌을 떠올렸다.
마지막 문장을 쓰고 고개를 들었을 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다시 몇 해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은색 아오자이를 입고 머리에 논라를 쓴 쓰엉이 부지런히 노를 저어서 강을 건너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