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은 고난의 대명사이다. 그렇다면, 한국인 중에 고난의 대명사는 누구일까. 가장 먼저 떠오른 이가 정약용이다. 다산과 욥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시대와 배경이 너무 다르기에 연속성보다는 불연속성이 많다. 따라서 두 사람의 삶과 고난을 ‘평행이론’으로 접근해보았다. 필자는 다산의 발자취를 찾아가며 다산과 욥, 두 사람의 대화에서 고난으로 인한 눈물과 한숨 소리, 낙심, 신음 소리, 인내, 고난 이후의 소망, 고난을 이겨내며 ‘정금과 옥(玉)’으로 정화되는 과정도 볼 수 있었다.
고난당할 때, 욥이 한 위대한 고백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기23:10)는 말이다. 정약용은 18년의 귀양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회갑을 맞이하며, “자찬묘지명”을 썼다.(1822년) “자찬묘지명”엔 자신의 지난 세월에 대한 눈물과 회한이 가득하다. 다산은 자신의 고난을 “간사한 이 설쳐댐은 널 옥(玉)으로 쓰심이라.”고 고백한다. 다산과 욥은 고난의 의미를 ‘정금과 옥(玉)’이라고 말한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다. 고난을 ‘정금과 옥’으로 정화(purification)되는 과정으로 인식한 것이다.
정약용을 보는 관점은 크게 3가지이다. 다산을 유학자와 실학자로 보는 견해로 대표적인 이가 박석무 선생이다. 다산을 천주교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려는 견해도 있다. 대표적인 이가 정민 교수다. 다산을 중도적인 입장에서 보려는 이도 있다. 금장태 교수다. 이 책은 정약용의 실학을 연구한 책은 아니다. 욥기를 주석한 책도 아니다. 단지 고난이란 주제로 욥과 정약용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는지, 또 그런 고난을 어떻게 수용하고 이겨내려고 몸부림쳤는지에 대한 일고(一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내려고 몸부림치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약용, 자연인 정약용, 아비로서의 정약용’을 그려보려 하였다. 영성이란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속내를 조금 볼 수 있고 사람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 들어가는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