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흑백사진을 정리하다가 새삼 발견하는 수많은 익명의 얼굴들과 가슴이 저리고 숨을 막히게 하던 최초의 여자애들이 아직도 그곳에 있어 절절한 과거로의 여행을 하게 한다. 시간의 정지인지 기억의 재생분자인지 내 컴퓨터의 60기가 장치보다 더 리얼해 '구만리 날개'를 펴 날고 있다고 이영준 씨한테 허풍을 쳤더니 그것 좀 보자고 해서 결국 이렇게 세상에 내보이게 되었다.
작품을 준비하면서 존 케이지(John Cage)의 '로라토리오(Roaratorio)'를 떠올리게 되었다. '로라토리오'는 케이지의 선불교에 대한 관심과 문명이 질러대는 소음, 환경, 음악, 울음소리 등 2천여 개의 장소를 채집한 것을 기반으로 한 음향 혼성교배이다.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이 음향짓들은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서사시를 케이지의 육성으로 녹음하여 텍스트의 중심축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며 우연 조작인 다성조의 콜라주, 번역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음향들이다.
존 케이지의 '로라토리오' 같이 1958-1964년까지의 이 흑백사진들도 낭만과 배고픔의 혼재를 지루할 정도로 콜라주한 미명의 시대상이다.
이 가을 문득 겹쳐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어, 스쳐가는 바람이 스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