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끊임없이 던지는 의문일 것이다. 누구나 살다보면 크고 작은 속임과 거짓과 사기를 경험하게 되고 이런 것을 인생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이라고 허탈해하기 일쑤다. 그래서 이런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을 것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고. 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해서는 안 될 일 중에 하나가 보증서는 것이란 경고도 수없이 들어오지 않았던가. 보증은 부모자식 사이에도 형제간에도 해서는 안 된다는 극단적인 경계의 대상이 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경고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저런 경구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사기란 믿을 수 있고, 믿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거나 또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흔히들 세상을 속고 속이는 사람들의 세계, 마치 교도소에서 교도관과 재소자의 관계를 속고 속이는 을 하는 곳이라고 하듯이 우리들 세상도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또 속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을 하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사기가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기를 흔하게 당하는 사람도 있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사기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하는 사람과 당하지 않는 사람 사이에는 분명히 무언가 다른 점이 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사기꾼은 상대를 쉽게 믿는 사람, 모험을 즐기는 사람, 극단적으로는 욕심이 지나친 사람을 사기범행의 표적으로 선택하는 것일까. 즉 피해자학적 관점에서의 매력적인 표적 또는 취약성 혹은 이런 이유에서 피해자 촉발이나 유발 또는 용이화도 한 몫을 했으리라 짐작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논의 자체가 잘못일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상대를 속이고 사기를 벌이는 것은 엄연히 심각한 범죄행위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가해자, 사기꾼에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사기극과 사기꾼들이 넘친다. 이 책에서는 바로 그런 사기꾼들은 누구이며,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상식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사기행각을 벌일 수 있었고, 어떻게 그 많은 피해자들은 속게 되었는지 사기꾼과 사기행위를 각종 기록 자료들을 활용하여 짚어 보았다. 독자들이 책을 읽음으로써 책의 사례와 같은 또는 유사한 사기의 피해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그러한 기대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할 뿐이다.
본서는 저자만의 노력으로는 그 출판이 불가능했음을 밝힌다. 저자의 저술 대부분을 출판해준 박영사에서 이번에도 기꺼이 출판을 맡아주어 감사할 따름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창욱, 승욱 두 아들과 아내의 응원에도 감사한다. 더구나 본서의 일러스트 그림을 그려준 아내 不二 박진숙 작가에게 따뜻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사법 정의는 어쩌면 국가 존립의 근간일지도 모른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가 서로 지켜야 할 그리고 지키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합의한 규범을 따르고, 계약을 지키기 마련이고, 그것을 지키지 않거나 따르지 않을 때 그가 누구라도 그로 인한 손실과 손상에 비례하여 신속하고 확실하게 처벌하는 것이 바로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당연하고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빈번하게, 그것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심지어 가장 민주적이고,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첨단 과학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나라에서까지, 일어나고 있다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비록 약간은 기울어지고 있는 추세이긴 하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사형제도의 존치와 폐지에 대한 논쟁에서 폐지론자들이 가장 중요시하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형이 폐지되어야 할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이 바로 “오판”의 가능성이다. 다른 모든 범죄의 억울한 오심 피해자도 빼앗긴 시간과 고통은 결코 회복되지도 돌려받지도 못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사형의 오판, 오심은 사형 자체도 문제인데 거기에 더하여 억울하고 무고하게 오판, 오심으로 사형이 선고되고 집행된다면 그 억울한 죽음은 어떻게 해도 회복되고 보상될 수 없지 않은가?
안타까운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이토록 중대한 일임에도, 더구나 첨단 과학기술과 그에 힘입은 온갖 과학수사 기법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도처에서 심심치 않게 이런 불행과 불상사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법 정의의 실현을 궁극의 목표로 하고 있는 사법제도와 기관들이 사법 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오히려 ‘오심’과 ‘오판’으로 대표되는 사법 부정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미국처럼 유독 흑인과 가난한 사람이 무고한 오심의 피해자가 되는 확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서, 무고한 흑인 피해자를 두고는 “당신은 태어난 순간부터 유죄이다”라고 희화화하고, 가난한 사람이 무고한 오심 피해자가 되는 것을 두고는 “가난의 반대는 부자가 아니라 부정의(Injustice)이다”라고 개탄한다. 그래서 미국의 사법제도가 백인, 중산층에게는 유죄가 확정되기까지는 무죄이지만, 흑인,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죄가 확정되기까지는 유죄라는 개탄의 소리가 나온다.
어쩌면 우선순위의 문제라고 하소연할 수도 있겠지만, 사법 정의는 법과 사법제도의 효율성보다는 효과성에 더 가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범죄자를 신속하게 검거하여 죄에 상응한 처벌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궁극의 사법 정의이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렇다면 설사 억울하고 무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신속하고 확실한 처벌을 우선할 것인지, 아니면 비록 조금은 늦어지고 일부는 놓치고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단 한 사람의 무고한 희생도 없는 사법의 운용이 우선되어야 할까? 독자들의 이해에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삼청공원 비탈길 옆 봄빛 가득한 고려사이버대학교 연구실에서
2024년 봄 - 서문
머리말
“피해자사법” 누군가에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처럼 우리에게 “피해자사법”이란 낯설기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유는 지금까지의 사법제도가 전통적으로 가해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 이름조차도 가해자인 범죄자를 뜻하는 “‘CRIMINAL’ Justice”, 즉 범죄자정의, 범죄자사법을 의미하는 ‘형사사법’이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문제는 절대다수의 피해자가 오로지 그 시간과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범죄의 희생자가 된 완전히 무고한 피해자임에도 사법제도에서 아무런 지위도, 역할도, 권리도, 보호와 지원도 없는 완전히 잊힌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범죄가 국가에 대한 해악이고, 따라서 사법제도는 국가와 피의자 사이의 적대적 대심제도로 운영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가 과연 국가에 대한 해악만일까. 대다수 범죄는 오히려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서, 사인이 사인에 대한 해악임에도 국가를 대표하는 검사가 피해자를 대신하여 사법 절차를 진행한다. 여기에는 어디에도 피해자가 설 자리는 없다. 여기에 더하여 가해자는 상당 수준의 권리가 헌법을 비롯한 온갖 법률로 보호되고 보장되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 완전히 무고한 피해자의 권리는 아직도 걸음마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피의자를 위한 ‘권리 장전’은 있어도 우리에겐 ‘피해자 권리 장전’은 없다. 아무리 양보해도, 상식적으로 무고한 피해자의 권리, 지원, 보호가 가해자인 피의자의 그것들보다 강하거나 적어도 그보다 못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사법제도의 궁극적 목표는 과연 무엇이어야 할까. 억제, 교화 개선, 무능력화, 응보? 사법제도가 사법 정의의 구현과 실현이 목표이고, 죄에 상응한 처벌이라는 사법 정의가 실현될지는 모르지만, 피해자의 피해는 전혀 회복되지 않지 않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과연 사법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당연히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가해자에 대한 죄에 상응한 처벌도 중요하지만, 범죄로 인한 피해가 완전하게 회복되어야만 사법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의 사법제도는 지금까지의 범죄자, 가해자를 중심으로 가해자를 지향하는 ‘범죄자사법’이 아니라 피해자를 중심으로 피해자를 지향하는 ‘피해자사법’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더 이상 완전히 무고한 피해자마저도 아무런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 채, 잊힌 존재(Forgotten Being)가 아니라 사법제도의 주체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저자의 소박한 바람과 주장을 이 책 “피해자사법”에 오롯이 담아 보았다. 아마도 이런 시도가 우리 학계에서도 처음이고 저자의 한계로 여러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겠지만, 앞으로 지속적으로 보완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 언제나처럼 본서의 출판을 맡아준 박영사 임직원 여러분, 특히 편집자 여러분께 감사드리고, 공동으로 작업한 아들이자 미국의 Texas A&M 대학교 이승욱 교수, 그리고 언제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는 가족 모두에게 감사한다.
2024년 7월 북촌 언덕의 고려사이버대학교 연구실에서
대표 저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