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앞으로 5년간 쓰일 날짜 없는 일기의 첫 권에 해당한다. 2022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쓴 글들을 묶은 것이다. 월별로 나뉘어 열두 장이다.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원고를 탈고하면서도 이 책의 성격에 대해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느낀다. 시를 쓰는 사람이 맞닥뜨렸을 언어의 편린들을 주워올린 일종의 문학 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고 에세이나 단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것들 전부이면서 그냥 단순히 자투리 글, 메모로 보이기도 한다. 글이나 시에 대한 생각 옆에 무심하게 펼쳐져 있는 시공간과 일상, 사물들과 현상들이 이리저리 스케치되는 까닭이다. 문학과 문학 아닌 것의 경계가, 시어와 시어 아닌 것의 차이가 늘 뚜렷한 것은 아니다. 아니, 이 경계와 차이를 의식하면서도 이것이 흐려지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했는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일정하지 않게 언어와 생각이 유출되는 것을 따라가본 글이다. 여러 모습으로 펼쳐지는 글이 되도록 그냥 두는 쪽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다소 방만한 쓰기이다. 시는 어떻게 써도 구조가 생기기 때문에, 구조와 싸우기 때문에 압력이 발생한다. 압력의 매력, 압력의 신비가 시쓰기일 것이다. 그래서 구조가 없고 문학적 외양도 갖추지 않은 이런 글을 왜 쓰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어떤 생산성이 있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동시에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이것이 문학의 전후에나 해당할 것이기 때문에 시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문학적 외관을 갖추지 않은 쓰기에 들어서는 일이 나의 그동안의 시쓰기에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중에 쓰기의 의식이 발생하는 순간을 직면하게 될지, 그것은 누구의 의식인지 등등, 익지 않은 생각들의 각축은 문학적 외관을 갖추지 않은 이와 같은 쓰기에 더 많이 열려 있을 것이다.
자유롭게 썼지만 그러기 위해서 살짝 염두에 둔 것은 있다. 이러한 흘러가기로서의 쓰기를 매 장면에서 실천해보려 했다는 점이다. 글이 움직이다가 형체를 이루거나 시처럼 이미지가 형성되려고 하면, 돌아나와 느슨한 호흡을 유지하고자 했다. 시가 되려는 긴장으로 들어서지 않고 평등하고 사소한 직시로 향하는 것이다. 미적 형식의 힘보다는 잠재적인 방향의 넓이를 떠올렸다. 글을 미결 상태로 남겨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실천은 구조와 완성에 이르지 않는 실천이고, 세계를 이루지 않는 실천이다.
비교적 규칙적으로 썼다. 하루에 몇 줄, 한 단락 정도를 넘지 않았다. 한꺼번에 쓰지 않고 아주 조금씩만 늘어나게 했다. 오래 붙잡고 있기보다는 자주 들락거리면서 환기하는 쪽이었다. 환기를 할수록 내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글쓰기는 좀 다른 느낌을 주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맞는데, 몇 마디의 언어, 몇 줄의 글에 내가, 하루가 의탁한다는 것이다. 날마다 언어에게 말을 걸고 언어가 태어나는 것은 뭐랄까, 글쓰기의 실행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언어를 통해 내가 실행되는 것에 가깝다. 글이 나를 쓴다. 그렇게 지난 한 해를 건넜다.
풀이 높이 자라나오는 계절이다. 그동안 짧은 에세이들을 더러 쓰기는 했지만 일기 형식에 얹어 이런 방향 없는 글을 집필한 것은 처음이다. 어떠한 글이든지 하고 싶은 대로 써보라고 한 난다의 김민정님에게 감사를 전한다. 권유가 아니었으면 새로운 풀들이 웃자라 있는 풀밭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원고를 읽어주고 검토해준 김동휘님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2023년 6월 - 책머리에
너는 네 장미를 뽑아 던져버린다.
그러나 꽃들은 방 안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다가
너에게 꽂혀 다시 꼬불꼬불 피어난다.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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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년 전이다.
어느 날 왜가리가 잘못 날아왔는데
왜가리로 잘못 보았는데
사실 지금도 왜가리를 잘 구별하지 못한다.
2015년 11월
“시를 쓴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시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이다. 질문은 행위를 묶게 마련인 까닭이다. 생각하지 않을 때 시는 움직인다. 동시에 생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에 시에 이를 길이 없어 보인다. 시는 시적 공허에 대한 직면으로 자주 대체된다.
시가 시 아닌 것과 언제나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태연하게 하찮음과 결탁한다. 정체 모를 껍질, 부유물이 그러한 것처럼 시를 들여다볼 수도 없다. 때때로 시는 텅 빈 전지(電池)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새것으로 갈아 끼운다고 해서 전류가 흐르는 것도 아니라면, 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삶과 죽음의 모든 가능성에 자신을 개방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시의 불가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는 시대를 불문하고 비결정적인 것이며, 언제나 처리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이해하는 인자(因子)가 되기를 요청받은 자리에서 언제나 명료한 태도를 취해온 곳이 아니다. 시는 늘 뭔가 다른 말을 하는 목소리로 존재해왔던 것이다. 이 ‘다름’이 껍질이고, 운동이고, 어려움이고, 시이면서 또한 비시일 것이다. 시가 복잡해지는 것은 사유의 결과도 아니고, 시대의 탓만도 아니다. 사실 시는 언제나 난해한 것이다. 바로 이 ‘다름’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요컨대 시의 어려움과 현대시의 문제성은 교차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 교차 지점을 현대적 아이템으로 덮어버리기보다는 그 자체로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수명 시론집 ,『횡단』(문예중앙, 2011) 서문에서
이 책은 지난해부터 출간하기 시작한 ‘날짜 없는 일기’의 두번째 권이다. 2023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 동안 쓴 일기를 한 권에 묶은 것이다. 날짜를 쓰지 않고 월별로만 장을 나눈 것은 첫 권 『내가 없는 쓰기』와 동일하다. 작년에 첫 권이 나왔을 때, 다른 것은 차치하고 1월부터 시작해서 12월로 끝나는 단순한 목차에서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일상이라는 것은 월별로 이루어진다. 책의 배치는 그것에 적합해 보이며 야단스럽지 않은 쓰기에 여전히 어울리는 것 같다.
가볍고 조용한 호흡으로 써내려간 글이다. 일상의 장면들을 포착한 것이 특별한 것일 수는 없다. 하루의 어느 행간에서, 짧은 틈새에서, 사소하고 밋밋한 것들이 더 많이, 더 자주 보이고, 그러한 것과 함께한 흔적이다. 문학화시킬 필요가 없는 평평한 순간들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문학적 액션을 가미하고 싶지 않은 순간, 어떠한 의미도 들어서지 않는 평이한 순간을 유지하려는 시도에 가깝다.
그러고 보니 시를 쓰는 내게는 언제나 어떤 저항이 남아 있는 듯하다. 시가 몰입, 에너지, 비약, 발산, 전략 같은 것이라면, 이러한 쓰기에 대한 저항 말이다. 시가 아닌 쓰기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어떤 식으로 가능한지 모르겠는데도 그렇게 해보게 된다. 그런 글쓰기가 가능한 것처럼 움직여보게 된다. 결국 문학의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날것의 글쓰기를 해보려는 욕구가 올해도 이 책을 쓰게 한 계기가 되고 있다. 내용 없이, 내용의 회전과 동력 없이, 마치 호흡을 하듯이 문장만을 따라가는 무미한 글을 써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향도 결국 문학을 온전히 걷어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버리게 하지는 못한다. 또 이쯤 되면 무엇을 버린다는 건지 엎치락뒤치락 알 수 없게 되는 측면도 있다. 이 책은 이러저러한 생각들마저 제어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쓰인 결과물이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두드러지게 두 갈래 글들이 들어서게 된 것 같다. 하나는 가벼움과 조용함으로 이루어진 일상의 무의미한 조각들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의 의구심 쪽으로 난 길이다. 이 의구심은 문학에 대한 크고 작은 메타적 생각에 닿아 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시와 글쓰기를 비롯하여 문학사, 시인들과 그들의 행로를 포괄한다. 한마디로 시와 글쓰기에 대한 약간의 거리감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시와 문학을 다시 바라본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시로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시가 아닌 글이 갈 수 있는 방향이다. 아무것도 아닌 글이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글이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작년에 이어 이 책을 쓰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조각 글들은 정적과 소음에 불과할 뿐, 어떠한 형체도 갖추지 못하고 모일 수도 없다. 무엇을 조직할 수도, 힘을 발휘할 수도 없다. 단지 형식으로부터의 놓여남에 불과할 뿐이다. 스스로도 미덥지 않아 하면서 말이다. 조직으로부터 풀려난 글은 처음부터 흩어져 있는 글이다. 아니면 곧 흩어져버릴 글들이다. 흩어지면서 잠시 숨을 쉬듯이, 중얼거리듯이, 혼잣말하듯이 놓여 있는 글들, 이 글들을 세상에 내보낸다.
연속해서 책을 출간해준, 그리고 작년의 일기까지 이번에 새로 단장을 해준 난다의 김민정 대표에게 감사를 드린다. 원고를 읽고 세심하게 살펴준 유성원님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2024년 10월 - 책머리에
『횡단』을 내고 7년 만에 두번째 시론집 『표면의 시학』을 묶는다. 시론은 시쓰기와 직접적 관련은 없다. 시로 향한 길을 내는 것이 아니라 시쓰기와 평행하게 달리는 일로 여겨진다. 시를 향해 낼 수 있는 길은 없는 것 같다. 시에서 나오는 길도 없기에 따라갈 수도 없다. 그러니 시론을 쓴다는 것은 방어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언제나 시의 부재를 감수해야만 한다. 또한 가능하지도 않지만 시보다 앞서게 된다면 시의 존재를 일그러뜨리고 말 것이다. 이렇게 앞도 뒤도 아니고, 적절하게 들어설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시론은 시와 평행하게 달리기이다. 그러나 이것이 시론의 가능성이다.
개인적으로 이 달리기에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고 느껴왔다. 여기에는 거리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그 무엇이 있다. 시론은 적절하게 시와의 거리두기여서, 긴장을 내내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이 거리로 인해 역설적으로 시와 가까이 있을 수 있다고 느끼기도 한다. 더불어 시론을 쓸 때 느껴지는 세속성, 여러 가정과 시도와 판단의 세속적인 오류가 주는 즐거움 역시 측량할 수 없다. 시쓰기는 판단이 아니고 일종의 모험이므로, 시론에서 판단의 놀이를 해볼 수가 있는 것이다. 시론이란 이렇게 저렇게 틀린 선을 불쑥 그어 선명하게 보는 일이 아닐까.
『횡단』이 주로 2010년 이전에 쓰인 글들을 모은 것이라면 이번 시론집은 2010년 이후에 발표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횡단』에서 마주했던 시쓰기가 갖는 혼돈을 공유하면서 이번 시론집은 좀더 분화된 각도로 움직이고 있다. 혼돈의 지류를 따라 더 나아가 본 것이다. 혼돈의 표류이고 발산이랄까. 이러한 파고는 시쓰기의 곤란을 『횡단』에서처럼 전면화하고 있지만, 이번 시론집에서 새삼 맞닥뜨린 곤란 중의 하나는 ‘표면’이다. 시쓰기가 곤란한 것은 아마 시쓰기가 기어이 표면에 닿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표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횡단’의 선들이 분방하게 움직이며 ‘표면’으로 나아간 모양새다. 그리하여 엉키고 흩어지는 선들이 출몰하는 ‘표면’이고 ‘표면의 시학’이다.
‘표면의 시학’이라는 말은 언뜻 선언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무엇인가를 함의하지 않는다. 상징적인 탐구의 대상도 아니다. 말 그대로 시는 표면의 자리에 있고, 시론은 표면에 있는 시를 보는 것이라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표면은 내면이 아니고 이면도 아니다. 보이는 부분이다. 따라서 시는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여기에는 들어 있다. 시는 보이는 것을 잘 보게 하는 것이다. ‘표면의 시학’은 이러한 생각에 부합한다. 그것은 단지 표면을 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기에 보지 못하는 표면을 보게 해준다. 표면을 떠돌며, 표면을 가로지르며, 그러면서 한편으로 표면을 겨냥하는, 모순적으로도 보이는 시학이다.
보르헤스는 말년의 소품 「원반」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느 왕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딘의 원반이오. 이것은 한쪽 면밖에 없소. 이 세상에 오직 한쪽 면밖에 없는 것은 이것 하나뿐이오.” 이 수수께끼 같은 대사에서 “한쪽 면밖에 없”는 것의 형체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소설은 그 형체를 묘사하지 않고 그것이 섬광처럼 반짝였고, 곧 사라졌고, 그를 본 화자가 평생(지금도)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고 쓰고 있을 뿐이다. 한 면밖에 없는 이 원반에는 내면도 이면도 존재하지 않는다. 표면의 순간밖에 없다. 그리고 그 존재는 어쩌면 표면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문학에 대한 일종의 우화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시론을 개진한 것이 1부이다. 시를 쓰는 순간에 밀착하여, 창작의 자리에서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 전개한 것들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창작론에 이어지는 글들은 시에서 문제적으로 생각되는 것들을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시에서의 상상이나 은유, 묘사 같은 고전적인 전제들이 실제 시작 과정이나 특히 최근에 어떻게 달리 나타나고 있는지 추적하기도 하고, 시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을 가늠해 보기 위해 시에서의 옹호나 지향의 관점을 들여오기도 하였다. 뒷부분에서는 범주를 좀 더 확장하여 시를 정보나 인공지능의 담론들과 관련지어 보고 있다.
1부의 시론적 성격에 비해 다른 글들은 평문이라 할 수 있다. 2부는 시문학사를 의식하게 하는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현대시의 좌표를 작성하기도 하고, 2000년대 이후부터 최근의 시를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현대성이나 시대성을 특징짓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본 글들이다. 3부는 시인론과 작품론을 아우른다. 이상이나 김구용의 문제적인 시에 대한 분석과 근래에 출간된 몇몇 시인들의 시집을 해설한 것이다. 한편의 시에 대한 천착에서부터 시집 해설에 이르기까지 해당 작품에 집중하여 쓴 것들이다. 그리고 4부는 세계의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작품에 대한 단상을 담고 있다. 텍스트의 성격과 현대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브 본느프와, 파울 첼란, 앤디 워홀 등의 작업을 다루었다.
책에 실린 글들은 근 7년에 걸쳐 쓰인 것으로, 또 발표 당시의 수록 지면의 성격에 따라 문체와 어조의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오히려 한 권의 시론집으로 성립하는 데 일조하기를 바라 마지않는 마음이다. 차이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다양한 문예지의 기획과 특집이다. 초대해준 많은 잡지들에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한 권의 책으로 대화해 준 시인들, 사상가들, 예술가들에게 새삼스럽지만 너무도 당연한 존경을 바친다. 그들의 고민과 모색이 있기에, 문학과 예술의 역사가 있기에, 그들과의 동행 속에서 역사 너머를 품을 수 있다.
봄비가 내리는 아침이다. 아주 멀리까지 나아가는 비를 보면서 언제나 맞닥뜨리는, 시의 부재를 본다. 시의 부재 앞에 서 있기를 좋아한다. 부재가 넓을수록, 미세하게 시의 존재가 감지되는 까닭이다.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책을 만들고 고생해준 김민정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2018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