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에서 한양까지 9백 리, 걸어서 빠르면 아흐레, 늦으면 보름도 걸리는 길입니다. 그 시절에 나이키를 신었겠습니까, 비행기를 탔겠습니까. 여자 몸으로 아이들까지 데리고 대관령을 넘어왔을 것 아닙니까? 매번 가마를 탔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양반집 안방마님이라는 말로 현실을 가리려는 것은 현대인들의 지나친 억측이 아닐까 합니다.” 긴 세월, 신사임당과 율곡의 업적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온 '율곡교육원' 정문교 원장은 인터뷰 내내 안타까운 기색이었다. 요컨대 현대인의 잣대로 한 여인의 숭고한 삶을 함부로 재단하려 들지 말라는 뼈 있는 항변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대관령을 돌아 나와 봉평으로, 파주로, 사임당의 흔적을 되짚어보면서 불쑥불쑥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5백 년 전, 이 땅에 살다 간 한 여인의 뜨거운 숨결이 게으름과 변명에 길들여진 나약한 영혼에 준열한 꾸짖음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