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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국내저자 > 소설

이름:박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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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고독의 경지>

거룩한 길

나는 2011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을 그린 소설 『백년 동안의 침묵』을 썼다. 그리고 2020년에 우당 선생의 형님 이석영의 독립운동사를 그린 소설 『순국』(상, 하)를 썼다. 그리고 이번에 쓴 『거룩한 길』은 두 권짜리로 된 『순국』을 5분의 1로 줄인 작품이다. 청소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나 쉽게 읽히기 위해서이다. 오늘날, 이회영으로 대표되는 6형제는 대한민국 제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현한 독립운동 가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회영은 우리 국민들에게 매우 익숙한 이름으로 각인되어 있다. 대략 정리하면 우당 이회영은 20대 청년 시절부터 관직 진출을 포기하고 을미사변부터 을사늑약을 거치는 격동의 시기부터 뜻이 맞는 동지들과 항일운동을 이끌면서 자금을 담당했다. 그러나 젊은 이회영은 부자도 아니었고 나라의 녹을 받는 관료도 아니었다. 모든 자금은 그의 둘째 형님 이석영이 맡아 주었다. 이회영이 항일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삼밭을 경영하고, 삼림을 조성하고, 제재소를 운영한 것이나, 또한 민족 교육을 위해 신학문을 가르치는 상동학원을 운영한 것, 전국에서 찾아오는 동지들을 규합하는 것, 각처에서 항일투쟁을 하는 동지들을 이끄는 것 모두 이석영의 재산이 자금줄이었다. 그러므로 두 사람은 분리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실과 바늘, 물과 물고기라고 할 수 있다. 이회영을 조명한 소설 『백년 동안의 침묵』에서도 이석영을 떼어 놓을 수가 없었듯이 이석영을 조명한 『순국』과 『거룩한 길』에서도 이회영을 떼어 놓고는 이야기를 전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형제들은 비극적인 순국을 하고 말았다. (중략) 도대체 조국이 뭐길래, 그들은 그토록 처절하게 살아야만 했을까. 지금도 더러 독립운동이 해방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일제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굳어졌고, 굶주리며 쫓기며 계속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 독립운동을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다. 그들은 독립운동만 포기한 게 아니라 조국을 버리고 친일파로 돌아섰다.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나라를 포기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그래서 더욱 그들은 빛나야 한다). 독립운동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독립운동의 본질이 갈린다. 당장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을 쟁취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록 해방의 날이 묘연하다 하더라도 끝까지 조국을 버리지 않고 싸우는 것이 진정한 애국이기 때문이다. - 책머리에

고독의 경지

고독은 열정을 창출한다 진정한 예술은 창조적인 예술가의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생긴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언제나 가슴 떨리게 한다. 그것은 고독을 전제로 한다. 오직 순결하고 경건하도록 심오한 고독 가운데 있을 때 가능하다. 고독은 혼자만의 즐거움이다. 고독은 혼자서 어떤 세계를 여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정서이다. 그래서일까, 고대로부터 철학자들이나 시인들은 기꺼이 고독을 즐겼다. 그들은 고독을 열정의 힘 성찰의 힘이라고 했다. 고독은 한층 독립적인 탓에 무엇이든 자유롭게 생각하고 창출 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고독 속에서만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인생은 관조적인 삶이라고 했다. 예수, 석가모니 등 성자들을 제외하고 인류사에 기록될만한 고독 주의자를 거론하자면, 다락방 철인 스피노자(B. D. Spinoza, 1632- 1677)가 으뜸일 것, 그가 고독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에티카��라는 위대한 저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피노자는 유대교의 교리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유대교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그의 지적 관심은 더 이상 보수적인 유대교에 머물 수 없었다. 뛰어난 창의적 사고를 지닌 그는 유대교의 정통적 교리와 성서 해석에서 벗어나 감히 유대교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했던 것이다. 파문 선고는 하늘 아래 스피노자와 말을 하거나 한 지붕 아래 함께 살거나 밥을 먹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그는 살던 곳 네덜란드를 벗어나 독일의 어느 다락방을 빌려 평생 안경알을 갈면서, 그를 추종하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철학의 쟁점이 되는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의 핵심을 다룬 ��에티카��를 썼다.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도 사양한 채 말이다. 사실 고독은 인간이 탄생하면서부터 짊어지고 나온 일종의 운명 같은 것이기도 하다. 구약성서 창세기 편부터 고독이 시작된다. 신은 맨 처음 한 사람(남성, 아담)을 만들어놓고 바라보며 고독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함께 할 동반자를 만들어(여성, 하와) 짝을 지어준다. 그들은 인구를 늘려가면서 고독을 뛰어넘으려 하지만 신의 각본대로 고독은 영원할 수밖에 없고, 이와 같은 아담 모티프는 성서의 중심을 이룬다. 시편의 150편이나 되는 다윗의 노래는 대부분 고독의 노래이다. 가족, 재산, 건강, 친구, 명예 등등 인간으로서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욥’이라는 인물이야말로 극에 달한 절대 고독의 주인공이다. 정작 고독의 정점은 인류를 위해 목숨 바친 그리스도 예수에서 꽃을 피운다. 예루살렘을 통치하는 로마군에게 체포되는 순간, 가장 믿는 수제자 베드로가 세 번이나 스승을 전혀 알지 못한다며 극구極口 부인한 것, 그리고 형 틀(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한 것은 고독의 경지를 넘어 인류를 구원하는 목적에 이른다. 고독은 그런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고독은 심신과 영혼이 혼자임을 말한다. 문제는 혼자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관건이다. 혼자(alone)라는 것, 오직 나 한 사람 즉 올 원(all-one)은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을 모두 체험할 수 있는 상황에 있게 되는데, 철학자 겸 에세이스트 에밀 시오랑(Emil Cioran, 1911-1995)은 혼자 있을 때의 긍정적인 한 가지 예로 글쓰기의 순간을 들었다. 시오랑은 “지금 이 순간, 나는 혼자다.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으랴. 이보다 더 강렬한 행복은 없거늘, 그렇다. 고독에 귀 기울이는 행복은 침묵의 힘을 받아 한층 더 불어난다.”고 했다. 시오랑뿐만 아니라 니체(F. W. Nietzsche, 1844-1900)는 “고독 속으로 피하라”했고, 릴케(R. M. Rilke, 1875-1927)는 고독이 그대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킬지라도 고독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고독은 외로움과는 사뭇 다르다. 고독이 외로움이고 외로움이 고독인 것 같은데 무언가 서로 다른 느낌이 든다. 외로움과 고독은 동의어로 통하기도 하고, 그 반대이기도 한 탓이다. 이런 이유로 외로움과 고독은 성격적으로 나뉠 때가 있다. 외로움은 수동적이라면 고독은 능동적이다. 외로움은 부정적인 감정을 동반한다면 고독은 긍정적인 감정을 동반한다. 외로움은 주로 환경이 만든다면 고독은 스스로 만들거나 선택하기도 한다. 외로움은 더러 수치심을 동반하는 탓에 남에게 외롭다는 것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아 감춘다면, 고독은 즐기기도 하는 탓에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고독은 사유와 성찰을 상징한 탓이기도 하고, 고독이 내포하는 힘이 인간을 그만큼 성숙시킨 탓이다. 그렇다. 고독은 고귀한 사유를 요구한다. 시오랑, 니체, 릴케 등의 고백처럼 시인은 혼자 있을 때 최고의 순간을 체험하게 된다. 고독이 철학자를 만나면 위대한 진리를 낳고, 예술가를 만나면 고귀한 예술을 획득하게 된다. 예술 가운데서도 언어예술에서 고독은 그 가치를 가장 높게 드높인다. 그래서 창작자는 고독을 동반자처럼 맞이한다. 고독은 작가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시인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문단사에서 ‘고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은 단연 김현승이다. 한국문단사에서 ‘푸라타나스’ 시인으로 통하는 김현승(1913-1975)의 고독에 대한 경사는 잎이 푸짐한 나무 플라타너스의 깊은 그늘로 상징된다. 일제강점기 언어마저 빼앗긴 현실에서 대부분의 시인, 작가들이 일본어로 문학을 하면서 일본을 찬양할 때 김현승은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펜을 꺾어버리고 말았다. 일제로부터 직장을 위협받으면서도 말이다. 몸통의 껍질이 벗겨져 하얀 속살이 드러나는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넓은 잎을 자랑하는 플라타너스처럼, 그는 죽도록 고독한 길을 묵묵히 가면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해방되기 전까지 일본화된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기약 없는 세월을 오로지 신념을 위해 일관했다. 그렇게 처절하도록 고독했던 그의 절대 고독은 지금까지 한국 문단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시대정신, 국민정신, 문학정신을 견인해 왔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소풍’의 시인 천상병(1930-1993)의 고독을 능가할 사람이 있을까, 천상병은 텅 빈 허공을 홀로 횡단하는 달처럼 인생 자체가 고독의 원천이었다. 천상병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나 고교(당시 학제는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성장했다. 일본에서 한인들은 멸시의 대상, 천덕꾸러기였다. 그래서 더욱 그리웠을 조국, 그런데 해방과 함께 조국에서 살아간 삶은 정작 고독했다. 군부독재 정부는 반공법(1961. 7. 3.)을 만들어 국민의 말과 행동을 엄격히 규제했다. 눈에 거슬리는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여 죽도록, 혹은 죽어도 좋을 만큼 고문했다. 무고한 천상병도 그런 희생자들 가운데 하나였고, 조국은 그를 정상의 궤도 밖으로 밀어내버리고 말았다. 따라서 그의 삶은 역설이었고 아이러니였다. 세상에서 길지 않는 삶을 소풍으로 치환해버린 그는 고교 2년 때 시인이 될 정도로 천재였고, 시를 쓰는 게 살아가는 이유였다. 그러나 누구는 그의 시를 시도 아니라고 할 만큼 그의 시는 허망, 처참했다. 김현승, 천상병을 위시하여 이 책에 실린 시인들 모두 고독한 성찰과 사유로 충만하다. 각 장은 첫째 ‘고독한 날개’를 시작으로 고독의 농도에 따라 고독한 응시, 고독한 침묵, 고독한 미소로 나누었다. 첫 장의 헤드라인 ‘고독한 날개’는 고독의 경지를 상징한다. 고독의 경지는 높이 나는 새의 고요처럼 예술의 가치를 높이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김현승, 천상병을 별도로 하고, 첫 장에 넣은 김두만, 박성희는 고인이 된 지 오래다. 두 사람은 늦게 문단에 나와 시작 생활 10년 만에 시집 한 권을 남기고 갔다. 박성희는 시집 출판을 준비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김두만 시인은 그나마 시집을 내고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10여 년 동안 암 투병을 하면서 어렵게 남기고 간 작품인 탓에 그들이 떠난 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 그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인백기천을 실현한 오정미 시집 역시 고독이 낳은 값진 열매이다. 한 권의 시집(��내 청춘의 플라타너스��)을 세상에 발표하기까지 그는 수많은 고통을 인내해야 했다. 시를 시작했을 때 오정미 시인은 70대 고령이었다. 오정미 시인은 젊어서 중풍을 앓았고 젊어서부터 보청기가 없으면 대화가 불가능한 삶을 살아야 했다. 중풍 후유증으로 발음도 비정상이었다. 그래서 남이 백을 할 때 천을 하는 인백기천의 노력을 기울여 10여 년 만에 80대 고령으로 시집을 낸 것이다. 송명희(부경대 명예 교수)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시도 고독이 빚어낸 작품이다. 이별은 결코 가벼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종(전 조선대 교수 역임) 시인의 시조 배증손은 먼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이지만 역사는 지나가고 만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이며 미래임을 보여준다. 두 번째 장은 ‘고독의 응시’라는 주제 아래 이용경, 김희진, 박석현, 홍희숙 시인을 묶었다. 이용경 시인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고독은 심오한 관념 세계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박석현 시인의 시공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유 또한 심오하다. 박석현 시인의 시집은 시선집으로 인생에 대한 연민과 회한에 닿고 있다. 김희진 시인의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현상학’을 보여준 고독은 비장미가 숨어 있다. 앞섶에 은장도를 감춘 것 같은 청춘의 고독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미망未忘의 시간을 관조한다. 홍희숙 시인은 찰나적 순간과 비움을 통해 상처의 회복을 추구하며, 권영숙의 시조는 흙을 통해 모성의 근본을 천착한다. 세 번째 네 번째 장 ‘고독의 침묵’과 ‘고독의 미소’에는 김태림, 류경자, 어미새 권영숙, 한정미, 명인숙, 신명자, 권갑숙, 이견숙을 묶었다. 김태림은 자아와 사물의 거리 재기를, 류경자는 일상에 대한 사유를, 어미새 권영숙은 상실에 대한 허무와 생명에 대한 애착을 보여준다. 한정미의 작품은 서정의 울창한 숲에 고독하게 서 있는 나무들을 낭만적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명인숙은 체험을 최대한 살려낸 작품으로 매우 진실하고 순수하지만 고독한 침묵 적 이미지가 가볍지 않다. 신명자의 작품은 청명한 가을 하늘을 시원하게 나는 새처럼 맑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깊숙한 내면에는 고독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견숙 시인은 일상을 스케치하듯 그려나간다. 잔잔한 호수 위를 물방개가 스치고 가듯이, 잔잔한 파동이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고독한 빛깔을 띤다. 권갑숙 수필 역시 일상을 담아낸 작품으로 외형적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음미할수록 고상하게 우러나는 차의 향기처럼 고독한 이미지를 깊이 내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고독 속에서 깊은 통찰을 보여주며 자신을 발견하려고 하는 사유자다운 태도를 견지한다. 그것은 고독이 밀어 올린 힘이며 고독에 대한 심취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 또한 시인들과 함께 고독에 깊이 동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가슴 떨리게 하는 말 ‘진정한 예술은 창조적인 예술가의 견딜 수 없는 충동에 의해 생긴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다시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 실린 작품은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 것이며 누군가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게 할 것이며 가슴 가득히 감동이 스며들게 할 것이라 믿는다. 아무쪼록 이 책이 시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이글을 마친다. 2024년 4월 해운대 장산 아래 집필실에서 - 머리말

꽃들은 말이 없다

우리의 기억은 그날로부터 멀어졌다. 이대로 살아도 좋을까? 이는 분명 우리가 안고 있는 부조리한 현상이며 불합리한 의식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작가에게 언어로 행동할 것을 종용하게 되고,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것을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을 쓰면서 행복하지는 못했지만 부족하나마 작가로서 소명감을 의식했다는 생각은 조금 들었다. 앞으로도 지구는 쉬지 않고 도는 불변의 진리를 수행할 것이다. 지구처럼 우리의 삶도 쉼 없이 돌고 돌면서 사건이 발생하고 되풀이될 것이다. 그리고 불행은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선택하지 않지만, 누구도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함께 행복하기 위해, 함께 행복하기를 빌면서 슬픔의 노래를 망각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엘리엇의 시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황무지」)처럼 잔인한 4월이 다시 잠든 뿌리를 깨워 향기로운 라일락을 피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선사시대 동굴벽화처럼 우리 모두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그날의 슬픔은 그들의 슬픔만으로 끝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존엄해야 하기 때문이다. 졸지에 멀리 떠나버린 그들은 이제 성인의 나이를 먹었다. 무사히 여행을 다녀왔다면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 당당한 사회인이 되어 우리와 함께 인생을 논하며 삶을 고민하며 오늘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영원한 10대의 소년 소녀로 하늘나라 별이 되었다. 오늘 밤도 어느 하늘에선가 어둡고 험한 이 세상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꽃들은 말이 없다. 말이 없는 그들 앞에 조용히 이 작품을 바친다.

순국 - 상

유골마저도 망명의 땅 허공에 흩어버린 이석영, 감히 필설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그의 순국은 너무나 비참, 처참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혈육 한 점, 뼈 한 조각 남김없이 철저히 산화하고 말았다. 이만 석 재산을 소진하고도 모자라 자식까지 모두 바쳐버린 그는 옷 한 벌, 사진 한 장, 신발 한 짝 남기지 않았다. 무덤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위해 아무도 울어주는 이 없었고, 기억해주는 이 없었다. 해방의 만세 소리가 산천을 흔들고 애국지사들이 앞다투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때도, 그 후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비극이 있지만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는 없다. (중략) 이석영이야말로 독립운동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그는 긴긴 세월, 기약 없는 세월을 이름도 얼굴도 없는 익명성으로 일관하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것은 79세의 고령까지 무서운 고통을 인내하면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음에도 그의 무덤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현충원에는 수많은 애국자들이 잠들어 있지만 그의 묘는 없다. 다만 서울 현충원 현충탑 지하에 무후선열(先烈無後,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선열) 영전에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석영은 더욱더 거룩하고 장엄한 순국을 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를 이해할 능력이나 알아줄 능력이 없었다. 자기를 부인한 채, 마치 한 자루 촛불처럼 마지막 숨결까지 남김없이 산화해버린 그를 우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그를 기억해야 한다. (하략)

순국 - 하

유골마저도 망명의 땅 허공에 흩어버린 이석영, 감히 필설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그의 순국은 너무나 비참, 처참했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혈육 한 점, 뼈 한 조각 남김없이 철저히 산화하고 말았다. 이만 석 재산을 소진하고도 모자라 자식까지 모두 바쳐버린 그는 옷 한 벌, 사진 한 장, 신발 한 짝 남기지 않았다. 무덤조차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위해 아무도 울어주는 이 없었고, 기억해주는 이 없었다. 해방의 만세 소리가 산천을 흔들고 애국지사들이 앞다투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올 때도, 그 후 무수한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국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비극이 있지만 이보다 더 비극적일 수는 없다. (중략) 이석영이야말로 독립운동의 본질을 보여주었다. 그는 긴긴 세월, 기약 없는 세월을 이름도 얼굴도 없는 익명성으로 일관하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것도 말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것은 79세의 고령까지 무서운 고통을 인내하면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음에도 그의 무덤조차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현충원에는 수많은 애국자들이 잠들어 있지만 그의 묘는 없다. 다만 서울 현충원 현충탑 지하에 무후선열(先烈無後, 대를 이을 자손이 없는 선열) 영전에 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석영은 더욱더 거룩하고 장엄한 순국을 한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그를 이해할 능력이나 알아줄 능력이 없었다. 자기를 부인한 채, 마치 한 자루 촛불처럼 마지막 숨결까지 남김없이 산화해버린 그를 우리는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그를 기억해야 한다. (하략)

청춘예찬 시대는 끝났다

…… (전략) 지금은 일 년 중 청춘의 계절 8월이다. 산은 푸르지만 이 시대는 청춘예찬론을 펼 수가 없다. 「청춘예찬 시대는 끝났다」는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한 고민이다. 지향점을 상실했거나 없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행한 일이다. 청춘들을 보면 자꾸 서글퍼짐을 숨길 수 없다. 우리의 미래보다 그들의 미래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함께 해보자는 제안이다. 앞으로는 청춘의 지향점도 바뀔 것이다. 신세대와 기성세대의 구분이 사라질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어 ‘기차표 예매를 취소하는’ 여지를 남겼다. 「에타니아」는 다문화를 통해 우리의 옛날을 들쳐보고자 함이다. 5, 60년대 한국 사회는 중산층은커녕 겨우 하루 세 끼 밥만 먹고 살아도 서울의 대부분 가정마다 시골에서 올라온 10대 소녀 식모들이 있었다. 한창 학교에 다닐 아이들이 밥 어미가 되어 어느 한 가정의 주방을 담당했던 것이다. (중략) 이제는 바야흐로 후진국 여성들이 그 소녀들을 대신하고 있는 현실에서 베트남 여성 ‘에타니아’를 통해 뭔가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때 우리가 무식하게 부려먹은 가련한 우리 딸들이 투영되어 있는 외국여성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던져보았다. 「자화상 · 스펙트럼」은 가치관과 정체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중심을 찾고 싶어 그려본 작품이다. 어느 시대나 예술가의 현실은 팍팍하다. 보편적으로 예술가는 인간의 정신을 대리한다. 그 대리 역할이 현실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훌쩍 어디론가 떠나는 행위는 단순한 객기가 아니다. 지고한 가치관을 찾아서 방황하는 것이다. 햇살 속을 들여다보면 먼지가 안개처럼 자욱하고, 그것이 아름다운 일곱 빛깔 무지개로 보이는 스펙트럼은 환상적이다. 먼지도 햇살을 만나면 아름다운 빛깔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에 착안했다. 사실 공기는 먼지로 채워져 있고 인간은 그 먼지 속에서 숨 쉬고 있는 것 아닌가. 먼지가 햇살을 만났을 때를 예술의 결정체로 보았다. 「연화」는 아름다운 예술미를 간직한 역사를 묘사했다. 7백 년 전 고려 연 씨가 멀리 개성에서 경남 함안이라는 곳으로 흘러와 묻혔다가 7백 년 만에 꽃으로 피어난 사연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사실로 출현했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잎에 숨어 있는 역사적 비밀을 풀어보고 싶었다. 「커피타임」과 「향기를 품다」는 부모와 자식 간의 경계 적 양상을 성찰해보고자 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거리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이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지, 이런 생각들의 모음이다. 「암홍어」는 말 그대로 홍어 잡이다. 몸값이 비싼 암홍어는 어부들을 유혹한다. 바다를 지키는 한 어부의 정신세계를 그리면서 도시에서 직장을 잃고 마지막으로 어부가 되겠다고 찾아가는 중년 남자들의 현실을 그렸다. (중략) 마지막으로 「위대한 출항」은 어머니의 헌신으로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자폐 아이를 묘사했다.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는 이 세상에 많다. 그러나 현대의학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어머니는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자신의 전도유망한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섬으로 들어가는 결심은 쉬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의 헌신으로 자폐의 깊은 수면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아이는 이제 세상을 향해 위대한 출항을 시작했다. 그러나 「위대한 출항」은 단순히 한 어머니의 헌신과 한 아이의 치유과정을 강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폐상태에 갇힐 수가 있다. 자폐는 감각이 닿지 않는 깊은 침묵이다. 그것을 깨워주는 무엇인가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 이 작품의 진정한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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