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화에서 달을 그릴 때, 달의 형태는 비워두고 그 주위의 구름을 그려서 달이 드러나게 하는 기법을 홍운탁월烘雲拓月이라고 한다. 김홍도의 <소림명월도>나 이경윤의 <고사관월도>가 그런 그림들이다. 서양화의 데생에서 목탄이나 연필로 석고상을 그리는 데도 비슷한 방법이 적용된다. 우리가 실제로 그리는 것은 석고상 자체가 아니라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이다. 밝은 회색에서 가장 짙은 어둠 사이의 풍부한 음영의 스펙트럼을 섬세하게 구분해 묘사함으로써 화면 위에서 석고상이 생생한 실체로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그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 꽃을 설명하는 글에는 꽃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 없다. 꽃 주위의, 꽃이 아닌 모든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꽃이 저절로 드러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꽃은 꽃이다”라는 동어반복의 선문답이 되기 때문이다.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이 글들이 사물의 그림자를 통해서 사물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본문 중에 나오는 파울 첼란의 시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2021년에 나온 『사물의 뒷모습』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의 뒷모습을 말하는 것은 사물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가 그 회색의 다채로움을 말하는 것이다.